피반령(皮盤嶺)을 머리에 이고 천년의 세월을 침묵하는 비밀의 탑이 있다. 청원군 가덕면 계산리 48번지에 있는 ‘계산리 오층석탑’이 그 주인공이다. 여느 석탑 같으면 절터에 따른 고유명칭이 통상 붙여지는 법인데 이곳은 어느 절터인지, 또는 절터 없이 탑만 있었던 것인지 그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높이 5.9m에 달하는 거대한 탑신과 육중한 모양새로 보아 예사 탑은 아닌 것 같은데 주변을 발굴해 보아도 절터나 건물 터의 흔적이 뚜렷하지 않다. 다만 백제의 맛이 스며든 기와편이 이따끔 탑 주변에서 출토되는 정도다.

청주와 회인을 잇는 피반령 고개 마루를 올려다보며, 날이 저물었으니 이 근처에서 하루 묵고 가라는 무언의 가르침인가. 대개 큰 재 아래에는 절 집과 과객의 숙소를 겸하는 원(院)이 경영되었는데 충주 하늘재와 대원사지(미륵리사지), 단양 죽령과 보국사(保國寺)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탑의 위치로 볼 때 계산리의 절터도 그런 기능을 수행한 것 같다.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것으로 예배의 으뜸 대상이나 충주 탑평리7층석탑처럼 풍수지리와 관련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절 없이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해 세워진 비보탑(裨補塔)이 있는가 하면 고려시대로 접어들며 신앙의 중심축이 탑에서 불상으로 옮겨가며 탑원(塔園)을 별도로 조영하거나 숫제 탑을 세우지 않는 경우도 발견된다.

탑은 고려시대로 접어들며 약식화되는 경향이 뚜렷한데 그 대표적 사례를 계산리 오층석탑에서 발견하게 된다. 기단은 2중기단에서 단층기단으로 바뀌었고 지붕돌(옥개석) 처마로 장식된 계단같은 층급받침 숫자도 5층에서 4층, 3층으로 줄어든다. 또한 옥개석 내림마루가 짧고 물매 경사가 급하며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피라미트 구조와 달리 사다리꼴 구조를 갖게 되고 탑 부재가 각이 진 것이 아니라 약간은 동글게 처리한 몰딩현상이 나타난다.

신라시대의 석탑이 날렵한 여인의 때깔 나는 자태라면 계산리 오층석탑은 충청도 상머슴 같은 질박한 맛을 준다. 시기는 고려이나 어딘지 모르게 백제적 요소가 녹아 있다. 나라는 망하여도 장인정신은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회인현 북쪽 15리에 신원(新院)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신원이 어디인가. 혹시 계산리 5층석탑 일대는 아니었을까. 계산리 5층석탑은 고문헌에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정체를 규명하기가 힘들다. 다만 일제 시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고적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가덕면은 현재 청원군에 속해 있지만 1914년 이전에는 회인현에 속해 있었다. 계산리 일대에는 5일장이 섰었다. 큰 재를 코앞에 두고 장이 선 것은 흔히 있던 일이다. 남도 과객들이나 등짐장수, 봇짐장수들은 이곳에서 한 파수를 본 후 하루를 묵고 피반령을 넘었으며 관리들은 조선시대 관립 여관 격인 신원을 이용했던 것이다. 현지사람들은 아직도 이곳을 ‘장터마을’이라고 부른다.

계산리의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걸작에 속한다.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조영수법이 교과서적이다. 탑의 발달과 쇠퇴 과정을 그대로 말해주는 탑이다. 탑 주변에는 뱀이 많다. 함부로 탑에 가까이 하다간 물리는 수도 있다. 체감율(줄어드는 비율)이 정연한 오층탑에는 어딘지 모르게 충청인의 정서가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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