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충북민예총 부회장

▲ 김기현
우리는 개인 스스로 아날로그나 디지털이나 그 어느 부분도 원하지 않았다. 단지 소통의 문화가 변해 가는 과정에 서있을 뿐이다. 소비자인 우리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하는 공간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생, 공존할 수 있을까? 아날로그는 디지털을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고 한다.

세상이 양분화 되기 이전의 세상인 태극 즉 카오스에 존재할 때의 혼돈은 오히려 선택의 과정보다는 주어진 시대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편이 편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식의 전달이 교육이라면 디지털 세상에서의 지식의 전달은 입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디지털을 생산하면서 아날로그라고 계속 우겨대는 광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공존이 아닌 혼돈을 가져오는 메타포일 뿐이다.

얼마 전 똑똑하다는 스마트폰이 내 주머니에서 달아났고 그 기간이 한참 되었다. 잃어버린 후 정확히 3일을 휴대전화 없이 다녔다. 그러던 중 임대폰을 받았다. 2G폰이었다. 2G가 뭔지 3G가 뭔지 그냥 사용하던 휴대전화가 각각의 세대 기능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휴대전화가 스마트하지 않아도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큰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고 오히려 왜 전화가 안 되냐? 뭐야! 문자를 씹어 등은 내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버렸다. 인터넷으로 소통한 지 10년이 넘으면서 접촉세대가 접속세대로 변하면서 속도가 붙었다는 것이다. 전화번호를 분실하고 스마트 폰으로 소통하던 모든 기능 정지돼도 많이 불편할 것 같던 생활이 2달이 되어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디지털은 그 컨버전스가 요란하다 하지만 디지털이 지향하는 목표는 휴머니티다. 인간적이고 인간에게 편리하고 인간이 요구하는 각종의 환경을 만들어 인간의 주변을 맴도는 비 인간의 반인반기의 기계이다. 결국 인간의 아날로그를 그대로 모방하고 수용을 한다는 것이 디지털의 목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디지털에 수용을 당하면서 인간의 손에서 사라지면 인간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이 불안과 초조함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대중은 한곳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복합공간을 선호한다. 멀티플렉스, 멀티 콤플렉스. 대중문화도 다르지 않다. 영화를 보면서 책과 음반 그리고 각종 문구류나 팬시용품을 구입할 수 있는 쇼핑은 물론이고 편안하게 음악을 들으며 커피나 음료를 마실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 오래전부터 각광받는 이유다. 대중을 견인하기 위한 방법이 디지털의 컨버전스를 활용했다면 이는 마케이팅의 디지털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의 모든 구성요소는 아날로그로 휴머니티를 위한 접촉인 것이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면서 메타포를 활용하는 기술은 디지털 세상에 디지털화하는 것이며 공생을 하려는 기술적 우위가 아닌 공존의 전략을 가지고 상생을 해야 하는 존재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디지털 미술은 1970년대 이후 예술가들이 테크놀로지를 혁신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테크놀로지 자체도 빠른 변화를 가져오며 1970년대 중반 예술가 맨드레드 모어(Manfred Mohr) 등에 의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변화의 중심에 서면서 미술의 시장이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디지털이 추구하던 월드 와이드 웹 이면에는 아날로그의 전통적 전시방식인 미술관에서의 전시 방법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있음을 잘 알고 이러한 시장의 구조는 아날로그의 힘이 존재하는 한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예술은 아날로그로 할 수 없는 스케일과 환상적 시각효과를 보여 줄 수 있는 장점 등으로 미술 시장에 여전히 복병으로 존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디지털세대 영국의 화가 데미안 허스트의 수 백억원을 호가하는 작품은 여전히 아날로그이며 그의 작품이 도난을 당하면 세상의 미술계가 들썩이는 것 또한 아날로그의 존재 방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어 이 공존의 존재 방식은 디날로그(Dinalogue)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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