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시간 밤샘 편집. 그저 웃지요”라던 27세 청년, 10개월만에 과로사
허울뿐인 방송국 프리랜서, 이면 충격…밤샘노동, 4대보험도 가입안돼

▲ 청주의 ○○ 방송 입사 10개월만에 27세의 청년이 장시간 밤샘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2012년 4월 사망한 사건이 뒤늦게 알려졌다. 사진의 그의 28번재 생일을 맞아 올 10월 친구들이 남긴 꽃다발과 그림.

지난 10월 10일은 故 이윤재 씨의 28번째 생일이었다. 친구들은 아직도 잊지 못했고 그의 SNS 계정에 생일 축하글을 남겼다. 친구들은 그가 유난히 좋아했다는 해바라기 꽃다발을 선물했다.

2013년 4월 1일. 이 씨의 사망 1주기를 맞던 날 친구들은 유달리 ‘거짓말 같다’는 말을 많이 남겼다. 김 모씨는 “거짓말같았던 오늘이 벌써 1년이나 흘렀네요. 보고 싶어요”라는 글을 남겼다.

또 다른 친구 김 모양도 “일년 전 오늘은 거짓말 같은 날이었는데 벌써 일년이 지났다는게 믿기질 않는다”라며 그를 추모했다.

2012년 4월 1일. 이윤재 씨는 새벽 5시 10분경 회사를 떠났다. 밤샘 작업후 퇴근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미리 약속된 축구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8시 30분경 회사로 돌아왔다. 10시경  청주 인근의 모 풋살장에서 경기는 시작됐고 그는 골키퍼를 봤다.

그리고 10분후에 그는 쓰러졌다. 고인의 사인은 과로에 의한 심인성 쇼크. 2011년 7월 입사한 뒤 채 10개월이 되기도 전에 27세의 청년은 만우절에 거짓말 같이 세상과 이별했다.

주당 60 ~ 70 시간 노동

이윤재씨의 근무환경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의 조건이었다. 2012년 1월 15일 그는 자신의 SNS 계정에 “32시간 동안의 편집. 드디어 끝났다. 새코너에 새로운 편집. 빡시다”라는 말을 남겼다. 1월 31일에는 “아! 드디어 스페셜 특집 편집 끝. 이제 잠못자고 밤 새는 건 일도 아닌 듯. 36시간의 밤샘편집과 촬영. 그저 웃지요”라고 썼다.

2011년 7월 14일 청주대신문방송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이 씨는 청주의 모 방송과 조연출 프리랜서 계약을 맺었다. 이후 담당 PD, 그와 같은 프리랜서로 계약된 작가와 한 팀이 된 그는 촬영과 영상편집업무를 수행했다.

이 씨는 재래시장을 중심으로 촬영되는 이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정감이 있어 재래시장의 풍경을 특히 좋아했다. 그러나 일은 고되었다. 일주일에 3일 정도 촬영이 끝나면 그는 나머지 3일 동안 편집업무를 수행했다. 

비정규직인 그에게 주간시간대에 방송국의 편집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편집업무는 정규직원이 퇴근한 뒤인 밤에 진행됐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는 취업 3개월째인 2011년 9월 28일에 “오늘도 난 편집. 죽을 것 같은 9월이 빨리 지나갔으면... 내 다크써클은 점점 내려오네”라고 SNS에 글을 남겼다. 그해 11월 10일에는 “이틀 밤째 편집. 7시간 후엔 촬영을 갔다와야 하는데... 버틸수 있겠지?”라며 자신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이 씨가 사망한 뒤 유족으로부터 산재승인업무를 위임받아 소송을 진행한 김민 노무사는 이 씨의 과도한 업무는 상상이상이었다고 말했다. 김 노무사의 말에 따르면 보통 일주일에 이틀은 밤샘 작업이 기본이었으며 주당 노동시간은 60시간에서 70시간 일 정도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프리랜서 급여 항목은 '제작비'

이윤재 씨는 ○○방송으로부터 한 편당 25만원을 수령했다.  월로 환산하면 100만원에서 최대 125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씨가 ○○방송으로부터 받은 것은 월급이 아니었다. 정규직 직원들의 급여는 인건비로 책정되지만 이 씨와 같은 프리랜서의 급여는 제작비에 포함돼 있었다.

프리랜서란 이유로 4대보험도 가입돼 있지 않았다. 주당 6,70시간 월 260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대한 보상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숨진 이 씨의 업무는 그가 사망하기 한 달 전부터 급등했다. 2012년 3월부터 기존의 프로그램 이외에 또 다른 프로그램 촬영과 편집업무가 추가됐다.

기존의 업무만으로 밤샘 작업이 이뤄졌던 것을 감안하면 추가된 업무로 인해 폭증했다고 김민 노무사는 설명했다. 지친 이 씨는 2012년 2월 24일 “고요한 밤. 잠못이루고 있는 분 계신가요? 저 심심해요. 말 동무 되어 주실분”을 찾았다.

꿈많은 27세 청년이 겪어야 했던 사회 첫 생활. 고상하게 포장된 방송사 프리랜서 그 이면에는 밤샘작업과 장시간 노동이 자리했고 결국 그의 육신을 그만큼 갉아 들어갔다.

그리고 3월 22일 이윤재씨는 “일주일만 여행다니며 쉬고 싶다. 푸욱...”이란 글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채 열 달만에 27세의 청년을 과로사로 내몬 프리랜서의 현실에 대해서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방송은 이 씨의 유족에게 어떤 금전적 보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가 아닌 프리랜서 신분을 강조했다.  “근무자료 등 자료를 요청한 유족들의 도움도 일절 거절했다”고 유족을 대리한 김민 노무사는 말했다.

일정표 살펴보니 과로사 ‘우연 아냐’
월화수목금토일 휴식없는 일과+밤샘 심야노동

고인의 3월달 1주일 일과표
월 : 더빙 및 종편 준비
화 : 종합 편집
수 : 방영일 / 촬영
목 : 촬영
금 : 촬영
토 : 편집
일 : 편집

고 이윤재 씨의 한 주간의 일정을 살펴보면 과로사가 우연이 아님을 쉽게 알수 있다. 고인이 사망하기 직전인 2012년 3월의 일정을 살펴보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쉬는 날이 없었다.

고인이 맡고 있던 프로그램은 일주일 내내 일정이 잡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프로그램을 추가로 맡았다. 살인적인 일정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다.

고인의 여동생은 ○○방송 입사 후 집에 한 번도 오지못했다고 말했다. 여동생은 방송 일정 때문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친구들도 이윤재 씨는 방송국에 파묻혀 살았다고 회상했다. 친구 A 씨는 “통화를 할 때도 뭐하냐고 물으면 항상 방송국에서 편집하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보통 늦은 밤이나 새벽에 통화랄 때가 많았는데 그 시간까지 늘 편집을 한다고, 그래서 방송국에 있다고 했다.

이윤재 씨가 사망하기 3일 전인 3월 28일에 마지막 통화를 했다는 친구 B 씨는 “3월 31일이 동아리 선배님의 결혼식이었는데 윤재가 방송국 일이 바빠서 참석하지 못한다고 대신 축의금을 전해줄 수 있냐는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이어“너무 피곤하다. 지친다. 친구들이랑 여행가고 싶다면서 5월에 시간되면 바다에 가자고 가고 싶다고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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