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회 변호사, 법무법인 청주로

변호사는 맡은 사건이 종결되면 숙명적으로 성적표를 받는다. 민사사건의 경우 상호 합의가 되어 종결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고든 피고든 한 쪽은 승소, 한쪽은 패소의 성적표를 받게 되고, 형사사건의 경우에는 유죄 아니면 무죄의 성적표를 받게 된다.

형사재판에서 의뢰인인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인정하는 경우라면 정상에 관한 변론을 하면서 양형에 대하여만 재판부를 설득하면 되지만, 무죄를 다투는 경우에는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특히, 최근 법정형량이 대폭 상향된 성범죄사건에서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피고인으로서는 인생을 건 큰 결단이 필요하고 변호인도 일전을 치를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섣불리 무죄를 주장하다가 유죄로 인정되는 날에는 중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범죄의 특성상 사건 현장에는 가해자로 의심받는 이와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만이 있을 뿐 객관적인 물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성추문 검사 사건이나, 연예인 고영욱과 박시후 성폭행 의혹이 그렇고 국제적인 망신을 초래한 윤창중의 인턴여직원 성추행사건이 그렇다.

이들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와 피고인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면 결국 진실게임이 된다.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당사자의 입에 주로 의존해 양측 진술의 일관성이나 신빙성에 의하여 진실여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검찰과 변호인은 미국 법정영화처럼 치열한 공방을 벌이게 되고 양측에서 제출·주장한 각 정황증거에 대한 판단은 판사들의 몫이다. 그러나 쌍방 진술의 신빙성을 가리기 어려운 애매한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건의 판결을 앞둔 판사들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늘어난다.

그러나 판사도 인간인지라 제아무리 고심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하더라도 오판이 있을 수 있고, 또한 판사 각자의 인생관, 가치관이 다르므로 같은 자료를 기초로 판단하더라도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때문에 1심에서 내린 결론이 2심, 3심에서 뒤집히는 경우가 있고, 만약 4·5심 있다면 다시 뒤집힐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 판결을 전수조사한 후 작성된 한 논문에 의하면 1995년부터 2012년 까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무죄로 뒤집어진 540건 가운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문제가 된 경우는 266건이고, 이 가운데 성폭력 범죄는 무려 240건에 이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성범죄사건의 경우 아리송한 경우가 많아 변호인조차 검사의 입장이 되어 피고인을 추궁해보고 점검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성범죄 사건을 비롯하여 유·무죄가 아리송한 사건의 경우 대안은 없을까.

국민참여재판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최근 안도현 시인의 허위사실공표죄에 대한 배심원들의 무죄평결을 계기로 국민참여재판의 한계가 논의되고 대폭 개정론이 있지만, 어렵게 시작한 이 제도를 축소·폐지하는 교각살우의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서양의 배심재판제도가 그저 주어진 제도가 아니고 국민들의 투쟁의 산물이듯이 우리의 국민참여재판제도는 사법을 민주화하고 투명한 재판을 통하여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꼭 필요한 제도인 만큼 사법부의 장식품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헌법에 명문규정을 두어서라도 더욱 확대·발전시키는 것이 국민을 존중하고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정신에 부합한다.

법리 판단이 아닌 애매한 사건의 사실인정에 있어서는 1명의 똑똑한 판사보다는 10명의 보통사람들의 상식과 국민법감정에 입각한 판단이 더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