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신과 인간>

이은규
인권연대 숨 일꾼

춥다, 많이. 눈도 내렸다. 아직 가을 변방 어디쯤에 있는 마음은 첫눈이 반갑지 않다. 흐르는 자연 앞에 무력한 인간. 어찌할 도리 없이 가만히 순응하며 겨울나기를 준비해야 겠다. 마음을 덥히고 몸을 덥히고 정신을 덥혀 혹한의 시간을 견뎌야 겠다. 스스로 말이다.

자연을 신이라 칭한다면 신의 시간은 무심하다 못해 냉정하다. 인간의 의지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가을을 붙잡지 못하고, 내리는 눈을 막을 수 없다. 자연의 이치를 누구라고 거스를 수 있겠는가? 선과 악에 대한 분별없이 무심한 것이 신의 시간이라면 인간의 시간은 늘 덜컹거리고 곤두박질치곤 한다. 신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 신과 인간 Of Gods and Men, 2010 프랑스 | 드라마 2012.01.19 15세이상관람가 | 122분 감독 자비에 보부아
무심한 시간에 개입하는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다. 허나 인간의 마음은 대부분 억지스러운 것이어서 그들의 시간은 늘 어두운 쪽으로 흐르고 있다. 어두움은 무지다. 무지는 두려움을, 두려움은 재앙을 낳고, 재앙은 신을 탄생시킨다. 어찌할까? 결국 어둠속에 빛이 있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진리로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시간을 돌고 돌아 결국 신의 시간으로의 귀환. 그러나 정작 인간은 이를 모른다. 빛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애시 당초 선택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저 두려움에 떨뿐.

알 수 없음으로 흐르는 인간의 시간을 살면서 무심한 신의 시간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신과 인간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너희는 신이며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허나 사람들처럼, 대관들처럼 죽으리라.”(시편82.6-7) 영화는 시편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알제리의 아틀라스 수도원과 수도원이 있는 마을의 아침 전경을 흐르는 물처럼 보여준다. 오래된 외딴 마을과 수도원은 닮아 있다.

사람들은 오늘도 그들의 일상을 살고 있다. 사는 것은 견뎌내는 것이리라. 늙은 뤽 수사는 의사다. 그는 줄지어 서 있는 마을의 환자들에게 약을 주고 필요한 생활용품을 나누어 준다. 이를테면 헤진 신발을 신고 있는 여인에게 새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발을 감싸줄 신발을 준다. 매우 익숙하게 말이다. 그녀는 잔잔하게 웃으며 수도원 밖을 나선다.

코란을 연구하는 수도원장 크리스티앙 수사와 밭을 일구는 수사, 주방 일을 하는 수사 그리고 너무 늙어 걷는 것조차 힘겨워 하는 아메데 수사 등 8명의 프랑스인 수사가 아틀라스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기도하고 노동하고 함께 식사하며 마을과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수도원 밭일을 종종 함께 하는 마을처녀가 어느 날 뤽 수사에게 묻는다. “사랑해보셨어요?” 부모님이 정해놓은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이 처녀는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을 모르겠다고 한다. “여러번… 결국엔 더 큰 사랑이 왔고 난 응답했지. 벌써 60년이 되었네.”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이 허다한 인간의 시간에서 늙은 수사와 젊은 처녀의 대화는 마치 성경에 나오는 시메온과 마리아의 대화를 닮았다. 미래를 예견케 하는….

이렇듯 소소한 일상이 흐르는 마을에 세상의 불안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마을 가까운 공사현장에 파견 나와 있던 크로아티아인들이 이슬람무장반군에 의해 참수당한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부패한 정부에 저항하는 반군은 이교도들과 정부에 협력하는 사람들을 처형했다. 나날이 격화되는 내전에 마을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결국 수도원에 있는 수사들도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기도와 노동 그리고 식사에 깊은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몇몇 수사들이 이곳을 철수할 것을 수도원장인 크리스티앙 수사에게 건의한다. 다른 몇몇 수사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그들은 너무 늙었고, 갈 곳이 없다는 이유로 이곳에 있겠다고 말한다. 결국 어떠한 결론도 못 내리고 그들의 불안한 일상이 무심하게 흘러간다. 크리스티앙 수사는 홀로 산책을 하며 기도를 한다. 오래된 나무를 만져보며, 하늘을 나는 새들을 바라보며, 흐르는 강을 마주하며.

정부의 고위관리가 신변안전을 장담할 수 없으니 떠나라고 하자 크리스티앙 수사는 “우리의 소명은 여기 사는 거야. 이 나라에서 두려워하는 이들과 함께. 우리는 이 생소한 이들과 함께 살 겁니다.” 동료수사들에게는 안심할 수 없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절. 모두 함께 여기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이슬람 반군이 수도원에도 찾아 들었다. 환자가 있으니 약을 가져가야겠다고.

허나 크리스티앙 수사는 “여기는 평화의 집이오.”라고 말하며 총을 든 그들을 수도원 문밖으로 인도한다. 그는 약은 마을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환자들에게도 매우 부족하기에 줄 수 없다고 거절한다. 이때 반군 지도자가 말한다. “당신한테 선택권은 없어!” 수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며 코란의 구절을 인용한다.

“믿는 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 중에 사제와 수도사가...” 반군이 이어 말한다. “수도사가 있을 것인데 그들은 누추하다.”크리스티앙은 그에게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들과 친합니다.” 반군은 빈손으로 철수를 결정한다. 뒤돌아가는 그들에게 크리스티앙이 말한다.

“오늘밤은 성탄절, 평화의 왕자가 오신 날입니다.” 가만히 듣고 바라보던 반군지도자가 그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실례했소. 난 몰랐소”그리고 그들은 떠난다. 수사들은 성탄전야미사를 드리며 실제로 맞닥뜨렸던 두려움에 떤다. 더 큰 혼돈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결국 그들은 근본적인 질문에 이르게 된다.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왜 순교해야 하는지?’, ‘하느님은 누구인지?’

격정과 울분에 찬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은 떠날 것인지, 머무를 것인지를 투표로 결정했다. 투표에 앞서 크리스티앙이 선험적으로 인간에게 전수된 말에 의지하여 말한다. “들꽃은 햇빛을 찾아 옮겨다니지 않는다. 주님께서 들꽃이 있는 곳을 비옥하게 해주신다.” 각자의 결심에 따른 선택을 하고 수사들은 감동에 젖어 고백을 한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반군을 치료해주고 죽은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는 이유로 수사들은 정부군에게 위협을 받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1996년 3월의 어느 날 밤, 수도원에 이슬람 반군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닥치고 일곱 명의 수사들은 납치된다. 뿌연 눈발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들의 모습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결국 그들은 두 달 후 잘린 목으로 발견되었으며 아직까지 그들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채 많은 의혹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알제리정부군에 의한 타살이라는 증거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지만 책임 있는 자들의 증언이 뒤따르지 않아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곱 명의 수사들과 무슨 상관이랴. 그것은 이미 인간들의 일. 인간의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희망하고 견뎌내었던 수사들은 신의 사람을 선택했을 뿐인데.

“... 모든 걸 털어놓은 이 감사의 편지는, 어제와 오늘의, 그리고 앞으로 친구인 당신들께 보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를 마지막 친구들에게도요. 그래요, 당신에게조차도 감사를 보냅니다. 당신이 상상할 작별인사도요. 다시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천국의 행복한 도둑들로서,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되기를…”(유언이 되어버린 크리스티앙 수사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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