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충실, 현안엔 반응하는 전형적 구 정치인
민한당 2번 낙선, 민정당으로 갈아타고 내리 4선

인생史…세상史-신경식 편
①정치준령의 ‘7부 능선’에 살다
②정일권의 남자 중용을 배우다
③개가 ‘돈’을 물고 다니던 시절
④차떼기 수렁에서 원로로 남다

▲ 14대 국회의원이었던 1995년 의정보고서 표지. 경마장은 돈방석이고 오송엔 월드컵 축구장이 들어선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공약은 애드벌룬이다.

신경식 전 의원의 정치인생은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정의당(민정당)에서 꽃이 피었다. 그러나 그의 정계입문은 민주한국당(민한당)이었다. 대한민국의 정당사는 연이은 쿠데타와 야합 수준의 합종연횡 속에서 깁고 기워 누더기와 같다.

1980년 12.12 쿠데타로 등장한 신군부는 유신실세들과 강성 야당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면서 자신들이 서식할 생태계를 마련한다. 민한당은 유치송 총재 등 온건한 야당정치인들이 11대 총선에 대비해 만든 당시의 제1야당이다.

신 전 의원은 “30대 중반에 차관급인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돼 크라운 6기통 관 30번을 타고 다니다가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어 오갈 데가 없어진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신 전 의원은 그러던 중 지인의 여혼이 열린 예식장에서 신당(민한당) 실세 가운데 한 사람인 신상우 의원을 만난다. 그에게 “신당을 만든다는데 나도 한자리 끼워줘요”라고 툭 던진 것이 자신의 정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다.

신 전 의원은 민한당에 가담해 고향 청원을 지역구로 선택한다. 지구당 위원당에, 도 지부장, 당무위원, 공천심사위원까지 맡았다. 청주·청원이 한 선거구로 묶여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였기 때문에 제1야당 후보의 당선은 떼놓은 당상으로 여겨지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 전 의원은 11, 12대 총선에서 민한당 후보로 내리 낙선한다.

1등은 여당인 민정당의 몫이었으나 2등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 11대 총선에서는 서주우유 회장을 지낸 윤석민(한국국민당) 후보에게 자리를 내줬다. 신 전 의원은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 박기정 기자가 청원에 내려와 쓴 현장르포에 ‘청주·청원에는 강아지도 5000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12대 총선은 김대중, 김영삼 등 야당 거목들의 정계복귀가 이뤄져 신민주당을 창당했고 신민당 후보였던 김현수가 2등으로 금배지를 단다.

1987년에는 6.10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져 정권교체의 열망이 봇물을 이뤘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이 독자출마의 길을 걸었고 결과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승리였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신 전 의원은 선택의 기로에 섰으나 결국 여당인 민정당을 선택한다. 공천 경쟁률이 12대 1이었으니 예선이 곧 본선이었다. 1명을 뽑는 소선거구제(청원)에서 그는 2위를 1만여표 차로 따돌리고 당선된다. 청원에서 내리 4선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돈과 담판지은 오창과학산업단지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선의 구(舊) 정치인들은 대부분 요즘의 정치인들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민원과 관계에 강하고, 정당의 이해를 떠나 지역의 요구에 강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충청리뷰가 <인생史…세상史>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보수정객인 신경식 전 의원을 다루자 불만을 넘어 분노를 나타내는 메시지가 전달되기도 했다.

이에 반해 신 전 의원의 현안에 대한 소신을 조명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시민운동가 Q씨는 전화를 걸어와 “2003년 12월 신행정수도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정치인은 신경식이었다. 신 전 의원은 소속 정당인 ‘한나라당을 더욱 세게 압박해라. 그래야 싸울 공간이 생긴다’고 주문했다. 그래서 법이 통과된 뒤 내부에서 감사패를 주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고 귀띔했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 신 전 의원이 꺼낸 첫 마디도 “눈치 보고 못했던 것, 사람들이 기대했던 만큼 도와주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는 것이었다. 요즘 정치인들이 이런 얘기를 한다면 ‘국회의원이 해결사냐, 소위 빽과 줄로 주변을 관리한 게 자랑이냐’며 여론의 뭇매를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 전 의원은 흘러간 정치인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사람을 성실히 관리한다. 신 전 의원은 “보름 전에는 내수에 가서 주례를 섰다.

1988년 당시 청원군의 면장, 조합장들과 만든 삼주회 모임에는 지금도 꼬박꼬박 참석한다. 첫 멤버는 2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다 죽고 8,9명만 남았다”고 밝혔다. 신 전 의원은 대한일보 시절의 기자들, 이회창 총재가 후보로 나섰던 2002년 대선 당시 시·도당 위원장들과도 모임을 갖고 있다. 시·도당 위원장 모임은 대선 패배 뒤 제주 함덕에서 결성돼 이름이 함덕회다.

신 전 의원은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도 관계를 적극 활용했다. 1992년 오창과학산업단지를 획정할 때는 마침 사돈인 권영각 전 건설부 장관이 토지개발공사 사장이었다. 신 전 의원은 “당시에 소문은 내지 않았지만 1990년 권 사장의 외아들과 내 장녀가 혼인을 해 사돈 간이었다. 이동호 충북지사를 대동하고 토개공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고향 문의에 내 공적비 세운다네”

1996년 11월 15대 국회 첫 예결위원회가 결성됐다. 도내 국회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예결위에 들어간 신 전 의원은 지역관련 예산을 반영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 중에 하나가 골조만 세워놓고 지체되던 충북대 병원 건립 예산 80억원이었다. 신 전 의원을 이를 전액 반영한 것을 지금도 자랑스러워한다.

밤을 새워 새해 예산안 계수조정을 마친 뒤 지역사업에 쓰라며 특별교부금 5000만원씩을 배정받았다. 신 전 의원은 이를 고향인 청원에 쓰기로 하고 당시 변종석 청원군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 전 군수는 신 전 의원의 결정에 맡겼다. 그래서 조성된 것이 문의문화재단지다.

신 전 의원은 문의가 고향이다. 문의는 대청댐 공사로 절반이 물에 잠겨 물 아래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대거 발생했고 물질적,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신 전 의원은 “댐 주변에 문화재단지를 조성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잃어버린 고향을 추억하자고 제안했고 확보한 5000만원에 군비를 보태 아쉬운 대로 문화재단지가 조성됐다”고 술회했다. 신 전 의원은 국회 문체공위원장 당시 인사동 등을 뒤져 수집한 도자기 200여점도 기증했다.

신 전 의원은 이후 고향에 내려갔다가 문화재 단지 초입에서 기념식수와 관련해 세운 비석 2개를 발견한다. 신 전 의원은 “공치사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 두 개의 돌에 충북지사 아무개, 청원군 아무개라고 새겨진 것을 보니 예산을 확보하고 전시물을 준비하느라 뛰어다녔던 것이 떠올라 씁쓸했다”고 털어놓았다.

신 전 의원은 바로 그 문화재단지에 12월11일 자신의 공적비가 세워진다는 사실도 넌지시 전했다. 문의연합번영회, 이장단협의회 등이 나서서 공적비 건립을 준비해왔고 이날 오전 11시 건립행사를 진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자기선전에도 강하고 감정표현도 솔직하다. 이 역시 구 정치인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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