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 대학 보낸 귀한 떡 들고 청주시내 누비는 박은식 씨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쯤 충북대학교 잔디밭. 그는 머리위에 떡이 가득 담긴 광주리를 학생들 사이로 와서 “떡 사세유”라고 외쳤다. 학생들이 떡을 사지 않더라도 지친 무릎을 쉴 요량으로 광주리를 내려놓고 우리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잊혀질 만 하면 청주시내 성안길 어딘가에서 마주치기도 했고 체육관 앞 노동자들의 집회장에서도 만났다.


이번 만남도 그랬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스치듯 만났다. 충청리뷰가 주관한 청주?오송간 KTX 마라톤 대회가 열린 무심천 롤러 스케이트장.

이번에는 광주리 대신 수레에 찹쌀도너츠와 바람떡을 싣고 박은식(62세)씨가 나타났다. 저간의 사정을 물어봤다. 박은식 씨는 “큰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집도 팔고 음성으로 이사갔어요”라고 답했다. 음성 대소에서 청주까지 매일 같이 떡을 팔러 나오시는 거다. 그러고 보니 옛 기억이 어스름하게 떠오른다. 박 씨의 고향은 음성 대소 였다. 농사를 짓던 박 씨는 나이 서른에 삼남매를 데리고 청주로 왔다.

그는 옆집 할머니를 따라 우연히 떡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박 씨가 떡 장사를 시작한지 벌써 32년이다. 이 기간이면 장인의 반열에 올랐을 기간이기도 하고 희노애락 모두를 겪었을 시간이다.

박 씨도 그랬다. 떡을 판 돈으로 자녀를 대학에 교육을 보냈다. 대성동에 집도 마련했다. 하지만 인생 새옹지마 였을까? 박 씨는 몇 해 전에 큰 아들이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말했다. 이 여파로 그동안 박씨가 모은 돈은 아들의 치료비에 들어갔다. 다시 고향인 음성 대소로 거주지를 옮겼다.

속으로 울컥했을 사연을 이야기 하는 박 씨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리고 다시 투박한 웃음을 지으며 20년전 어린 학생이었던 필자의 손을 잡는다.

박 씨는 지금도 떡을 팔기 위해 새벽도 판다. 음성 대소에서 출발해 대전으로 가 떡을 구입하고 다시 청주로 와 9시부터 판매를 시작한다. 행사장, 시내 사무실, 대학 교정 이 곳 저 곳을 누빈다.

32년, 박 씨에겐 어떤 봄 날이 있었을까? 아니 아직 봄날이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우연히 박은식 씨의 떡 수레를 마주하게 될 또 다른 이들에게 부탁한다. 인생 희노애락이 담긴 박 씨의 떡 맛 한번 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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