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을 쥔 권력을 6년 간 보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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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을 쥔 권력을 6년 간 보좌하다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3.11.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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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에 목숨 건 박정희, 의장, 장·차관도 감시
내년 1월17일, 정일권 추모 20주기 행사 계획
인생史…세상史-신경식 편
①정치준령의 ‘7부 능선’에 살다
②정일권의 남자 중용을 배우다
③개가 ‘돈’을 물고 다니던 시절
④차떼기 수렁에서 원로로 남다

시인이나 교사를 꿈꿨던 샌님 신경식이 신문기자가 된 것도 인생사의 파격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25살 신출내기 시절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와 매달 독대를 하는 특별한 기자가 됐다. 지난 호에 서술했듯이 1964년 5월9일자 대한일보에 <국무총리 정일권, 외무부 장관 손원일>이라는 특종을 터뜨린 덕택이었다.

정일권 총리와 인연은 그의 인생을 극적으로 반전시킨다. 어찌 보면 정 전 총리의 인생부터가 드라마틱했다. 만주에서 고학을 하고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를 거쳐 해방 전후 국군경비대 창설의 주역이었던 정일권 총리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을 발판으로 군인의 꽃인 대장이 된다. 5.16쿠데타 이후에는 군의 원로로 정계에 발탁돼 장장 6년 7개월의 국무총리, 6년 간 국회의장을 지냈다.

▲ 국회 개원문제를 협의하고 있는 정일권(가운데) 국회의장과 이철승 부의장. 오른쪽이 신경식 전 의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한 17년 동안 박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권력은 칼자루가 아니라 칼날을 쥔 권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일권이 총리와 국회의장으로 13년 가까이 권좌의 주변에 머문 것은 과히 신공(神功)의 수준이라 할만하다. 신경식 전 의원이 최고위층의 비서실장을 5번이나 역임하고 ‘7부 능선에는 적이 없다’는 정치철학을 갖게 된 것도 기실 정일권의 삶에 전염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총리인선 특종, 훗날 의장비서실로

1973년 2월 유신체제 속에서 9대 국회가 개원했다. 국무총리에서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정일권 의원은 90%에 가까운 득표로 국회의장에 당선됐다. 8대 국회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몇 달 의정활동을 한 것이 전부인 정일권 의장은 당시 대한일보 정치부장이었던 신경식 전 의원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정치에 대해 훤한 신 부장이 의장비서실로 와서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신 전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신문기자로 출발한 만큼 편집국장까지는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10여년 동안 각별한 관계를 가져온 정 의장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결국 신 전 의원은 며칠 동안의 고민 끝에 사표를 던지고 입법부 1급 공무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출발은 국회의장 수석비서관이었다.

오비이락이라고나 할까. 신 전 의원이 비서실로 자리를 옮기고 20여일이 지나 대한일보가 자진 폐간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언하고 체제강화에 몰두할 때 당시 군부의 실력자였던 Y장군이 술자리에서 말실수를 한 것이 빌미가 돼 구속됐는데, 유탄이 Y장군의 스폰서였던 김연준 대한일보 회장(당시 한양대 총장)에게 날아들었던 것.

김 회장은 수재의연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고 이것이 자진 폐간의 계기가 됐다. 신 전 의원은 “내가 폐간 직전에 비서실로 간 것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정말로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당시 대한일보 기자들과는 지금도 교류하며 지낸다”고 설명했다.

정일권 전 국회의장은 총리에 이어 6년 동안 국회의장을 역임하는 동안 살얼음판 위에 있었고 비서실장인 신 전 의원이 남산신세를 지기도 했다. 1975년 1월의 일이다. 신 전 의원은 “새벽 1시쯤 대문을 두드려 문을 열어주니 건장한 사내 2명이 구둣발로 집에 들어와 나를 연행했다. 영문도 모르고 남산의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끌려갔는데 과거 신문기자 시절에도 몇 번 불려갔던 곳이었다.

끌려가보니 ‘2월 중순쯤 긴급조치 폐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비밀계획이 국회의장실에서 흘러나갔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신 전 의원은 또 “옆방에는 노신영 외무부 차관이 끌려와 있었다. 노 차관과 대질신문을 벌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 정일권 의장 내외는 한남동 공관에서 신 전 의원(당시 비서실장)의 생일을 축하해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미국엔 키신저, 한국에는 ‘신신저’

간첩만 조작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조직도가 늘 문제였다. 김형욱, 이후락의 중앙정보부와 경쟁하던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은 청와대 근처에 안가를 차려놓고 사설 정보팀을 운영했다. 이 팀에서 올린 보고서 가운데 하나가 박 대통령 축출음모였다. 차 실장은 새 정권의 수장으로 정일권을 지목하고 조직도를 그렸다. 지종걸, 양정규, 오정근 등 현역 의원들이 남산으로 불려가 호된 조사를 받았다. 결국 풍문을 부풀린 정보보고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

어찌 됐든 정 전 의장은 보이지 않는 유리칼들이 도처에서 자신을 겨눈 상황에서도 6년을 장수했다. 신 전 의원은 “의장실에는 임기 6년 동안 ‘중용(中庸)’이라고 쓴 붓글씨 액자가 걸려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정 전 의장을 일컬어 ‘관운이 억세게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운이 아니라 인내와 노력의 결과로 본다”고 강조했다.

신 전 의원은 정 전 의장을 보필하며 배운 친화력으로 이후에도 권력의 7부 능선에서 살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비서실에 들어가면서 정 전 의장에게 한 조언이 “국회의장은 야당과 언론만 잘 다루면 된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신 전 의원이 특유의 충청도 기질을 지녔기에 정 전 의장의 친화력을 스펀지처럼 흡인했는지도 모른다.

신 전 의원은 이에 대해 “비서실장으로 일할 당시 청주 출신으로 6선의 야당 거목인 이민우 신민당 원내총무가 미아리에 살았다. 삼양동 산 위에서 양계장을 했는데, 깊은 밤 이 의원을 찾아가서 막후 접촉을 가진 적이 많았다. 고향선배라 깍듯이 대접을 하면 ‘그래, 그럽시다’하며 청을 들어줬다”고 회상했다.

신 전 의원은 이어 “나중에 신문기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 ‘또 신경식이 다녀갔군’ 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미·중 정상회담 개최를 주선한 키신저를 예로 들며, ‘미국에 키신저가 있다면 한국에는 신신저가 있다’는 가십기사를 쓰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신 전 의원은 정일권 국회의장을 필두로 여당 총재, 대통령 후보 등 5명의 정치지도자를 보필했다. 그러나 그는 ‘정일권의 남자’로 기억되길 바란다. 신 전 의원은 1980년 12.12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고, 1981년 실시된 11대 총선에 출마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때 정치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정 전 의장은 선거자금에 보태라며 황금열쇠를 준다. 신 전 의원은 “실제 돈이 없어서 그 열쇠를 팔았다. 이제와 생각하면 어려워도 팔지 않을 걸 그랬다. 그분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이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내년 1월17일은 정일권 전 국회의장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신 전 의원은 “헌정회 차원에서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내가 모든 것을 챙기고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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