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만 남고 ‘홍명희’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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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만 남고 ‘홍명희’는 가라?
  • 권혁상 기자
  • 승인 2013.11.08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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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홍명희 문학제, 괴산 보훈단체 반발로 파행 내년부터 외지 개최 합의

청주에서 국도를 따라 괴산으로 접어드는 고갯길 모래재. 오르막 끄트머리에 우뚝 서 있는 괴산군 상징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임꺽정’이 지역 대표 농산물 고추를 품에 안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소설 ‘임꺽정’의 주인공이 고추 홍보대사(?)로 변신했으니 이채롭다.

괴산읍내로 접어들어 동부리로 향하면 ‘임꺽정로’ 도로표지판을 만난다. ‘이제 다 왔구나’ 싶어 한옥 생가 주차장에 내려서면 뜻밖의 안내표지판에 멈칫한다. 소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 생가’로 알고 왔는데 ‘홍범식 고택’으로 표기돼 있기 때문. 벽초의 아버지 홍범식은 경술국치에 비분강개해 자결 순국한 항일열사다. 아버지 홍범식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임꺽정 상징물에 임꺽정로까지 명명한 괴산군이 정작 ‘홍명희 생가’로 부르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1990년대 중반 고가 표지판에 ‘소설 임꺽정 작가 벽초 홍명희 생가’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훈단체 반발로 ‘동부리 고가’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홍범식 고택’으로 명명된 것은 2002년 괴산군이 매입해 복원한뒤 문화재 지정을 받으면서 이뤄졌다.

‘임꺽정’은 벽초가 1928년부터 10년이상 조선일보에 연재한 대하 역사소설이다. 투옥 등 고초를 겪느라 중간중간 연재를 쉬기도 했지만 장안의 화제작 이었기 때문에 장기간 실리게 된 것. 일제와 해방 시기 가장 인기를 끌었던 소설이지만 1948년 벽초가 월북하자 금서가 되버렸다. 당시 벽초는 남북협상을 위해 김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한뒤 그대로 남아 부주석에 임명됐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보훈단체 회원들은 벽초를 전범으로 인식하고 있는 입장이다.

남북 이데올로기 냉전속에 갇혀있던 ‘임꺽정’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한 출판사의 결단에서 비롯됐다. (주)사계절출판사는 1985년 5공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소설 임꺽정 출판을 강행했다. 정부는 즉시 판매금지 조치했고 출판사 대표를 구속했다. 이에 출판사는 법적대응을 통해 1989년 승소했고 이후 북한의 비정치적 저작물에 대한 출판을 합법화하는 계기가 됐다.

사계절출판사는 1996년 ‘벽초 홍명희 문학제’를 기획, 충북민예총·충북작가회의와 공동으로 올해 18회째 행사를 가졌다. 문학제는 청주와 괴산을 오가며 진행됐지만 주행사를 괴산에서 할 때는 보훈단체와 시비가 벌어졌다. 결국 1998년(3회), 2003년(8회)~2006년(11회), 작년와 올해를 합쳐 총 7번만 괴산에서 열렸다. 2/3는 청주나 서울 등 외지에서 열린 셈이다.

지난 3일 ‘제18회 홍명희 문학제’ 장소로 괴산군민회관을 예정했지만 보훈단체가 물리적 저지를 공언하고 나섰다. 결국 주최측은 ‘벽초가 북한 부수상을 역임한 사실과 도의적인 책임을 공개하고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등 의식을 갖추는 것’을 조건으로 보훈단체와 합의했다.

특히 보훈단체의 요구로 내년부터 괴산에서 행사를 열지 않기로 했다. ‘임꺽정’을 지역 브랜드로 삼은 괴산군은 뒷전에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2차례에 걸쳐 행사 보조금 예산도 세웠지만 보훈단체의 눈치를 본 군의회가 전액삭감하자 뒷짐만 지고 있었다.

‘임꺽정’의 형상만 살려두고 정신적 지주인 작가는 나몰라라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기형적 행보가 괴산군에 어떤 득이 될지 우려스럽다. 한때 4년 연속(노무현 정부 시기) 괴산군에서 별탈없이 진행됐던 전례에 비춰 본다면 보훈단체 설득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민원 눈치보기에 급급한 지역 선출직 공직자들이 과연, 괴산고추축제의 ‘임꺽정 선발대회’에선 어떤 표정이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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