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부 기자로, 정일권 국회의장과 각별한 인연
‘물과 기름 YS-昌’ 대이어 보필한 독특한 이력

연재를 시작하며
끝없이 흐르는 역사의 장강 위에 인생은 그저 한줌의 촌음이다. 그러나 꼬치꼬치 사연을 캐어물으면 촌부의 삶도 이야기가 한 타래다. 하물며 역사적인 순간을 주도하거나 가담했던 이들은 어떻겠는가. 몇 년 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모 방송사의 역사회고 다큐멘터리가 세간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불편했던 진실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실체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정치와 행정, 시민사회의 지역원로들을 지상에 초대해 지난 얘기들을 격주로 들어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인생史…세상史-신경식 편
①정치준령의 ‘7부 능선’에 살다

②정일권의 남자 중용을 배우다
③개가 ‘돈’을 물고 다니던 시절
④차떼기 수렁에서 원로로 남다

정치인 신경식(76)은 2002년 16대 대선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국회의장과 여당 총재, 대통령 후보 비서실장 등 비서실장만 다섯 번 역임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또 같은 지역구에서 내리 4선(13~16대)에 성공한 흔치 않은 정치인이다. 자민련 바람이 거셌던 15·16대 총선에서도 극적으로 지역구를 지켰다.

신경식 전 의원은 ‘구시대 정치인’이지만 완전히 흘러간 정치인도 아니다. 여기에서 ‘구시대’란 중의적 표현이다. 우선 그는 2002년 기업으로부터 대선자금을 불법 모금한 이른바 ‘차떼기 사건’의 핵심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됐고 5선의 길도 막혔다. 그러나 검찰조사 결과 단 한 푼도 배달사고를 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면서 당에서는 존경받는 원로가 됐다. 그는 현재 새누리당 상임고문이다.

신 전 의원을 10월27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만났다. 신 전 의원은 인터뷰 초입에 이렇게 운을 뗐다. “정치에서 한 발 물러나고 보니 눈치보고 못했던 것, 사람들이 기대했던 만큼 도와주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 후배 국회의원들을 만나면 물러난 뒤에 후회하지 말고 100% 봐주라고 당부한다.” 이래서 신 전 의원은 또 구시대 정치인이다. 돈이 민심을 움직이고 해결사가 되어 지역구를 관리하던 것이 그 시대의 정치였다.

신 전 의원은 자신에 대해 “지역구도에서 자유로운 인물, 충청도 기질이 몸에 밴 인물”이라고 자평했다. 정상급 정치지도자들의 비서실장으로 살 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가 말하는 관운도 여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2008년 펴낸 회고록의 제목도 그래서 <7부 능선엔 적이 없다>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도 이 책 추천사에서 ‘어눌하고 숫기 없는 충청도 양반’ ‘타고난 절제의 달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정도다.

시인, 교사를 꿈꾸다 기자 되다

▲ 정일권 국무총리와 인연은 기자시절부터 이어졌다. 주민들에게 사인을 하는 정 총리와 이를 취재하는 당시 신경식(오른쪽) 대한일보 기자.
굳이 산문에 들어서 정상정복을 꿈꾸지 않는 산사나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신 전 의원이 기자가 되기 전까지의 인생소사를 들어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청원군 문의면이 고향인 신 전 의원은 청주중·청주고(30회)를 졸업했다. 신 전 의원은 아직까지 맥을 잇고 있는 연합문학동아리 ‘푸른문’의 창립멤버였고 고2 때 충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분기점>이라는 시로 당선된 문학소년이었다. ‘내 노동으로’의 신동문 시인이 신 전 의원의 종조부(작은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신 전 의원은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고려대 영문과 4학년 학생이었다. 고려대생으로서 4.19는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었다. 주동자는 아니었지만 혁명의 현장에 동참하며 고뇌했다. 그리고 4.19 직후 군에 자원입대했다가 1962년 9월 복학했다.

신 전 의원은 “4.19 직후라 세상이 혼란스러워 어문학을 전공한 학생이 갈 수 있는 곳은 교사나 언론 정도였다. 교수님 소개로 상명여고 교사 면접을 봤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여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전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산 석간신문에서 대한신문 공채 공고를 봤고 그길로 응시원서를 받아왔다”고 설명했다.

14명의 수습기자를 뽑는 공채에 900명이 몰렸지만 합격자 명단의 첫머리에 신경식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신 전 의원은 적성을 살려 문화부 기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수습을 마친 뒤 배치된 부서는 정치부였다. 25살의 신출내기 기자의 첫 출입처는 중앙청이었다.

신 전 의원은 “웅장한 석조건물에 높은 천장, 모든 것이 어마어마했다. 군정시절이라 장관들은 군복을 입고 국장들은 권총을 차고 근무했다”고 회고했다. 여고생을 가르치는 것도 두려웠던 샌님이 군정시대에 중앙청 출입기자가 됐다는 것은 일대사건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앞길에는 인생의 방향타를 서서히 돌려놓을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이 외무부 장관 맡아주세요”

▲ 기자시절의 신경식 전 의원. 노상에서 당시 김종필 의원을 인터뷰하고 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민정이양이라는 명분 아래 1963년 12월17일 군복을 벗고 출마했다. 결과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의 대결에서 힘겨운 승리였다. 5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민습수습 차원에서 최두선 적십자 총재를 총리로 임명했으나 이 내각은 6개월 만에 일괄 사퇴했다.

1964년 5월9일, 신 전 의원은 일요일이지만 새 내각 구성에 관심이 쏠려있던 터라 오전 10시쯤 출입처인 중앙청에 들렀다. 수위실에 들러 기자실 열쇠를 찾고 있는데 국방색 비옷을 입은 중년신사가 역시 수위실로 불쑥 들어왔다. “형님이 꼭 외무부 장관을 맡아주셔야 되겠습니다.” 그 사내는 최두선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을 맡았던 정일권이었다.

중앙청 수위인 것처럼 앉아서 엿듣다가 정일권씨가 자리를 뜨자마자 신문사를 향해 뛰었다. 다음날 대한일보 1면 톱은 <국무총리 정일권, 외무부 장관 손원일>이었다. 다른 신문들은 2단에서 3단으로 <금주 중 내각 발표할 듯> <총리는 오리무중>이라고 다뤘으니 수위실에서 건진 특종이었다.

신 전 의원은 총리발표가 나고 10여일 뒤 총리공관에 단독으로 초대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 대통령으로부터 ‘총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정 총리가 외무부 장관으로 손원일 제독을 추천했고 청와대에서 나오자마자 중앙청으로 들어와 전화를 건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절대보안을 당부했던 터라 정일권씨는 하마터면 총리에 오르지도 못할 뻔 했다.”

이날 조찬만남을 계기로 기자 신경식은 매달 한 차례 정일권 국무총리와 ‘조용한 시간’을 갖는 사이가 됐다. 그의 정치인생은 이때부터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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