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각 서원대 역사학과 교수

▲ 김연각 서원대 역사학과 교수
꽤나 길었던 추석 연휴도 이제는 다 끝났다. 여느 때처럼 이번 추석에도 평소 자주 보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들 많이 보았다. 그리고 역시 여느 추석 때처럼 그분들은 여전히 변함없는 확신이랄까 반석 위에 세워진 튼튼한 신앙이랄까 그런 것들로 충만해 있으니 참으로 대단들 하시다 싶더라.

가령 ‘녹조라떼’라는 것을 대량생산하는 시설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이 낸 세금이 엄청나게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녹조라떼 대량생산 시설을 유지 보수하는 데 역시 세금 엄청나게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녹조라떼를 그냥 마실 수 없어서 정화하는 데 또 역시 엄청난 세금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은 필요한 사업이었다고 말할 때의 그 확신에 찬 태도, 요지부동의 신심을 보노라니.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시코(Sicko)에 이런 장면이 있다. 무어가 영국의 어느 노신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인데, 그 노신사 왈 “세계 인구의 1%가 세계 부의 80%를 소유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사람들이 참고 견딘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중략)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 번째는 겁주기이고 두 번째는 기죽이기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한다. “만일 X나 Y의 빈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에게 투표한다면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혁명이 될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X와 Y는 나라 이름인데 필자가 잠시 숨겨두고 싶어서 그리 표기한 것이다. 그 노신사의 말은 대중이 겁먹거나 기가 죽어서 부당한 현실을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바로 잡을 기회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딴은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겁주기와 기죽이기만으로 확신이나 신앙심을 만들 수는 없다. 가령 내가 그 상위 1%에 끼지 못해서 좀 배가 아프지만 그런 현실은 정당하다거나 하다못해 자연의 섭리라는 믿음, 그런 정당하거나 자연스러운 현실에 대하여 못마땅해 하는 것은 패배자의 딴지걸기나 아니면 종북좌빨의 선전선동이라는 믿음 같은 것은 겁주기나 기죽이기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예화가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다. 검찰총장이라는 자가 혼외 자식을 두고 있다는데 그런 자에게 준 봉급에도 내 세금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화난다고 하시기에 대선 당시 야당 후보 비판 비방하는 댓글놀이 하는 공무원들에게도 우리가 낸 세금이 지급되었는데 그 건에 대해서는 화나시지 않느냐고 물으니 검찰총장 건은 조선일보에 난 확실한 사실이고 국정원 건은 아직 재판 중이니 무죄추정해야 한다고 반박하실 때의 그 당당함이라니! 이게 어디 겁먹거나 기죽은 사람이 보일 수 있는 태도라 할 수 있겠는가?

위 인용문에서 X와 Y라 적으면서 숨겨둔 나라는 미국과 영국이다. 민주주의 선두주자라 할 영미의 대중이 그러하다면 후발주자인 한국의 경우는 그래도 좀 봐줄 수 있지 않을까?

겁주기와 기죽이기가 원흉이라면 용기 북돋아 주고 기 살려 주면 되지 않을까? 힐링 같은 것 말이다. 아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이 그다지 여유롭지 못하며, 용기 돋워주고 기 살려 주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일 뿐만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원흉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세뇌가 그것이다.

늘 그렇듯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은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면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없다, 있어도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 혹은 개인 수준에의 문제일 뿐이라고들 생각하니까 문제해결이 요원한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할까? 별로 뾰족한 수가 없으니 사람 없는 외진 곳에 가서 이렇게 외쳐 보고나 싶다. “바로 세뇌가 문제야, 이 착한 바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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