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각 서원대 교수

▲ 김연각 서원대 교수
어떻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이 그냥 모르고 살아도 큰 탈 없는 것이라면 특별히 거론할 필요가 없겠지만,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 심지어 보통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런 경우라면 그것을 아는 누군가가 그것에 대하여 얘기를 꺼내고 또 그것을 널리 알리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니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그것에 대하여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 누군가가 가능하면 나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토록 ‘당연하고 중요한 것’을 내가 애써 얘기하고 전파하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별로 귀담아 들어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말 꺼낸 내가 너무 속상하고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면서? 적어도 지금까지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 그러나 어쩌랴? 때가 때인지라 더는 남의 눈치만 보고 있을 수 없게 되어 버린 듯하다.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 ‘당연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정치의 편재성(遍在性)에 관한 것이다. 정치의 정의를 아무리 다양하게 한다고 해도 권력, 권위, 물리적 힘, 혹은 폭력 등 알기 쉬운 우리말로 ‘힘’을 빼놓고 정치를 정의할 수는 없다. 그 힘이 정당한 것이든 부당한 것이든 이것과 전적으로 무관한 정치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정치는 무인도에 표류해서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닌 한,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하나의 사회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어디 가도 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개개인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런 사실에 대하여 좋아 하든 싫어하든 무관하게 말이다. 가령 세상 어디에 가서도 맥주 한 병 사 마실 때 주세, 부가가치세 등의 세금을 반드시 물어야 하게 되어 있다.

물론 나라에 따라 세율이나 세목에 차이야 있겠지만. 당사자가 알든 모르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이 사실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이다. 이처럼 정치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니, 정치를 마치 정치인들이나 하는 사업, 청와대나 여의도 사람들이나 하는 일 정도로 치부한다면, 이는 단순히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이처럼 객관적 사실을 부정한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잘못된 정치는 사나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그런데 옛날 임금과 양반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시절 정치가 잘못 되었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들에게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국민의 ‘위임’을 받아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에게 임명된 사람들이 국가의 거의 모든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말하는 ‘위임’의 과정과 절차가 정당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위임을 받은 자들이 위임의 범위를 넘어 권력을 행사한다면 위임을 한 자들은 반드시 그걸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런데 그 위임의 과정이나 절차 자체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면?

정치의 편재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정치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좋든 나쁘든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치가 편재하면서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 민주시민 모두가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역시 그다지 어렵지 않다. 흔히 그렇듯이 어려운 것은 머리가 이해한 바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 당신은 어떠한가? 아니,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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