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균 취재1팀 기자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사상가이자 철학가인 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머리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구절은 현실에 딱 들어맞는다. 80년대 말 광장을 휩쓸었던 ‘민주주의’라는 말이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광장에서 부활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잊혀져 갔던 ‘방송장악 중단하라’는 아우성도 다시 되살아 났다. 그러나 결코 반갑지 않다. 좀비처럼 되살아난 이 역사는 처음에도 비극이었고 두 번째도 비극이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민주통합당이 광장으로 나왔다. 이들은 국정원 댓글 사건을 ‘정권재창출을 위한 선거 개입사건’으로 규정했다. 국정원에 대해서는 ‘정권의 시녀로 타락했다’고 비판했다. 공무원인 국정원 직원들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지 않고 정권을 이익을 위해 복무했다”고 비판했다.

모든 역사는 반복된다. 13년 전 공무원노조가 출범할 때 이들은 선언했다. “이제 우리도 더 이상 굴종의 역사 속에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중략) 권력과 가진 자들에 의하여 흔들려온 공직사회를 바로 세우고…(중략)”. 공무원노조는 ‘더 이상 정권의 하수인이기를 거부한다’고 결연하게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 대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받아 들이지 않았다.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이 전교조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대량징계로 맞섰고 대규모 구속으로 사태를 마무리 하려했다. 이것이 나타내는 의미는 무엇일까?

민주통합당의 정통성이 있는 두 정부 또한 공무원이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지금 광장에서 국정원을 ‘정권의 시녀로 타락했다’고 비판하는 민주통합당 의원들은 그때 공무원노조의 합법화에 어떤 입장을 내보냈을까.

역사는 10년을 주기로 두 번 반복됐다. 한번은 공무원 노조에 대해 비극으로, 두 번째는 새누리당의 희극으로 반복됐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퇴보로 인한 희생자는 언제나 시민과 약자이다.

민주통합당은 이 시기 진정으로 곱씹어 볼 지점이 있다. 설국열차의 꼬리칸의 사람들이 맨 앞 칸까지 전진하길 원하는가. 아니면 윌포드와 길리엄의 야합처럼 중간에서 적당한 균형점을 이루기를 원하는가.

민주주의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정권에 따라 민주주의의 척도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국정원 직원도 따지고 보면 일개 공무원에 불과하다. 13년 전부터 ‘권력의 하수인이기를 거부한다’는 공무원들의 선언이 있었고 이들 중 충북에서만 17명이 아직도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이것의 원죄는 누구인가. 참여정부인가? 새누리당인가? 누가 해결할 문제인가?

1970년 빌 브란트 전 독일 총리는 폴란드 방문 때 유태인 위령비 앞에 무릎 꿇고 사죄했다. 독일 검찰은 지난 4월 93세의 나치 전범 용의자 ‘한스 리프시스’를 체포했다. 1941년부터 4년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 학살에 가담한 혐의다.

국정원이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민주통합당이 되돌아 볼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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