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야차 이의민(李義旼)을 몰아내고 고려 무신정권의 권좌를 차지한 최충헌(崔忠獻) 최충수(崔忠粹) 형제는 정권을 잡기 전에 이의민 4부자로부터 심한 핍박을 당하였다. 서로 죽이고 죽는 난장판 무인시대에 최충헌 형제의 권력욕과 복수심의 뇌관을 건드린 일이 발생하였으니 다름 아닌 ‘비둘기 사건’이다.

최충수가 애지중지 키우던 비둘기 한 쌍이 어느 날 이의민의 둘째 아들인 이지영(李至英)의 집으로 날아들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李至純), 이지영, 이지광(李至光) 삼형제는 재물 수탈과 부녀자 겁간을 밥먹듯 하였는데 특히 지영과 지광의 행패가 심해 세간에서는 둘을 쌍도자(雙刀子)라 불렀다.

지영에게는 자운선이라는 애첩이 있었다. 자운선은 압록강 변경의 유랑민 집단인 무자리 출신이라는 설도 있고 기녀 출신이라는 얘기도 있다. 자태가 곱고 가무에 뛰어나 지영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자운선은 집안으로 날아든 비둘기에 모이를 주며 이를 키우려했는데 최충수가 화급히 찾아와서 비둘기 반환을 요구하였다. 자운선은 돌려주지 않으려 버티었고 최충수는 ‘내가 키우던 것이니 돌려달라’고 따졌다. 가재는 게편이라고 이지영은 자운선의 편을 들며 이를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하인들을 시켜 최충수를 결박지었다.

최충수는 ‘장군이 종에게 묶일 수 없다’ 하며 부당함을 따지자 이지영도 풀어주었다. 표면적으로 둘은 화해한 듯 하였으나 이 비둘기 사건은 최충헌 형제의 분노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최충수는 이 사전의 자초지종을 형, 최충헌에게 고해바쳤다. 최충헌, 최충수 형제는 이의민 부자의 제거를 큰 누이의 아들인 박진재(朴晉材) 등과 함께 모의하였다. 박진재는 정팔품 산원(散員)에 불과하였으나 지략이 뛰어난 재사였다. 최충헌 형제의 모의는 거의 박진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최충헌은 조위총(趙位寵)의 난 때 공을 세워 별초도령(別抄都令)에 올랐으나 당시 무신정권의 제1인자인 이의민을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우 충수는 성정이 불같아 당장 이의민을 치자고 부추겼으나 형 충헌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가는 신중형이었다.

기회를 엿보던 충헌 형제는 1196년, 이의민이 미타산(彌陀山) 별장으로 행차하는 틈을 타서 이의민을 기습, 산사를 피로 물들이고 그의 아들 삼형제까지 처단하였다.

이지영의 애첩 자운선은 남몰래 최충헌을 흠모하였는지 몰라도 기실 자운선은 최충헌의 전리품이었다. 최충수의 비둘기를 못 내놓겠다고 앙탈을 부리던 자운선은 이지영의 품에서 최충헌의 품으로 자리를 옮겼다.

욕망의 잔은 차면 넘치게 마련이다. 무신정권을 움켜 쥔 최충헌 형제에게 골육상쟁의 아픔이 다가왔으니 이 또한 업보가 아니고 무엇이랴. 충수는 자기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 하였고 충헌은 이를 반대하였다. 무신정권 초창기에 이의방(李義方)이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가 세인의 눈총을 받은 일을 경계하며 동생의 탐욕에 제동을 걸었다.

이 일로 인하여 형제 사이는 편편치 않았고 드디어 두 사병 집단이 충돌하여 충수는 목숨을 잃고 만다. 그후 최충헌은 철권통치로 만적(萬積)의 난 등 저항세력을 평정하였는데 만적은 다름아닌 최충헌의 가노(家奴)였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신분해방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만적이었지만 뿌리깊은 봉건사상과 무인시대의 철퇴에 그의 봉기는 불발에 그쳤다. 무인시대는 서로 싸우다 형제가 싸우고 종당에는 주인과 종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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