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굴하지 않은 공손’과 ‘군림하지 않는 품위’ 공존 필요하다
'고객은 왕'식 과도한 친절마케팅 역효과 업계 … 구인난 자초

 감정노동자들은 ‘진상’ 고객을 ‘상진이 엄마’라 부른다. 감정노동자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상진이 엄마’의 유형과 사례가 빼곡이 올라와 있다.

이들은 커뮤니티에서 본인의 대응 담을 공유하고 허탈한 웃음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화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빗대며 분노를 유머로 표현했다. “농구있네. 축구싶냐! 야구르지? 볼링없다”

하지만 이들이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위로 받을 곳이 없다. 진상고객 조차도 여전히 왕으로 대접해야 하고 어린 아이에게도 90도 각도로 허리 숙여 인사해야 한다. 하다못해 사물과 가격에도 극존칭을 붙여야한다. 그래서 이들은 절규한다. “누가 고객을 왕으로 만들었냐고?”
 

▲ 매장에 출입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대형마트 종사자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소비자들은 ‘불편한 친절’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진제공 : 전국민간서비스연맹노동조합)

‘VOC’는 ‘Voice of Customer’의 약자로서 ‘고객의 소리’로 번역된다. VOC시스템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들어오는 모든 고객의 소리를 통합적으로 접수하고 그 처리 결과를 저장한다. 저장된 정보를 통해 고객의 불만사항, 칭찬사항, 성향, 만족도 등을 측정하여 서비스 품질관리 활동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포괄적인 고객관계 관리시스템이다.

하지만 감정노동자에겐 VOC 시스템은 공포의 대상이다. 이곳을 통해 불친절 민원이 접수되면 해당 점포나 관련 부서만 아니라 매장 전체가 들썩인다. 본사차원의 사실 조사가 이뤄지고, 확인결과 불친절 사례가 3회에 도달한 입점 업체는 바로 퇴출된다.

이 결과는 매장 전체의 서비스 평가에 바로 반영된다. 대형마트의 전직 지점장을 지냈던 송호근(43세·가명) 씨는 “매출이 부진한 것은 용서 받을 수 있지만 서비스 평가에서 하위로 평가받으면 용서란 없다. 바로 퇴출대상으로 찍힌다”고 증언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작용도 속출 한다. 송 씨에 의하면 “분명히 고객의 잘못이 분명하지만 VOC에 민원이 접수 될까봐 무조건 사과부터 하게 된다”며 “꽃바구니를 들고 민원을 제기할 것 같은 고객의 집까지 찾아가 사과를 했던 일이 부지기수”라고 설명했다.

‘고객은 왕이다’는 말은 유통과 서비스 기업의 신성불가침한 구호가 됐다. 이 시스템 하에서 서비스 제공자는 고객의 어떤 행위도 항거 할 수가 없다.

감정노동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인 ‘진상고객’은 이점을 이용한다. 유통 매장에서 일하는 감정노동자들이 전하는 ‘진상고객은’은 개그프로그램 ‘정여사’를 능가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다 사용한 4개월이 지난 화장품을 가지고 피부 트러블이 발생했다며 환불을 요구하는 것은 애교에 불과하다.

고객이 여러 명 있을 때 자신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며 반말과 욕설, 사과를 요구하다 결국 약간의 사은품으로 웃으며 돌아가는 고객도 있다.

‘불편한 친절’에 불과, 고객도 싫다

과잉 친절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은 막상 어떨까?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형마트 매장에서 고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과잉친절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우세했다. 이들은 감정 노동자로부터 허리 깊이 숙인 인사를 받았을 때 57.7%가 ‘지나친 친절은 불편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대접받는 느낌이다’는 36.2%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은 어떤 상황을 ‘불편한 친절’로 받아들일까?  너무 친절하다보니 온갖 사물에 존칭을 붙이며 응대하는 것을 가장 큰 ‘불편한 친절’로 꼽았다. 예를 들면 “네, 고객님. 가격이 1000원 이십니다.”, “물건에 하자가 계셔서 반품을 원하시는 겁니까? 고객님” 같은 표현이다.

두 번째로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여서 인사하는 것을 꼽았다. 심하게 표현해 조직폭력배에게 인사하는 것 같다고 했다.  소비자는 콜센터에서 첫 머리로 사용하는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란 표현을 세번째 ‘불편한 친절’ 사례로 꼽았다. 이 외에도 소비자는 말 끝마다 ‘네 고객님. 오늘만’, ‘네, 고객님, 한번만’이란 표현을 지나친 표현으로 꼽았다.

소비자들의 다수는 감정노동자들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정 노동자들을 대할 때 88%가 ‘반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또 ‘고객은 왕이니까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은 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화를 끊을 권리·고객을 피할 권리가 필요하다.
기업, 무감정 강요 말고 자아 치료프로그램 병행해야

 ‘고객’이라는 이름 앞에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다. 서비스 사업장의 경우 8~10%정도가 고도의 우울증을 포함한 우울증상을 보이고 있으며 신체폭행, 욕설, 성희롱, 인격적 폭력을 경험한 사례가 90%를 넘었다.

이 결과는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서비스업 종사자 29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통해 나타났다.  고도 우울증을 앓고 있는 비율이 8.1%, 중등 우울증이 11.9%, 경증 우울증이 28.7%, 정상이 51.3%로 나타났다.

이렇게 정신적 피해를 입은 감정노동자를 대상으로 치유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오정란(청주해피마인드)  소장은 원인은 자아를 배제한 감정노동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오 소장은  "기업이 직무 연수와 같은 교육을 실시할 때 친절과 성공, 조직적 목표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만 채우고 있는데 비해 서비스 업무를 수행 할 당사자의 내면에 대한 배려는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직무서비스 교육에서부터  손동작, 발동작, 억지 미소와 같은 기계적 동작만 주입하고, 이면에 존재하는 당사자의 감정은 배제한다는 것이다. 반면 “고객으로부터 무시, 폭언,  폭행 같은 사건을 접한 뒤 내면의 감정이 장기간 억압되면 그 결과가 반드시 뒤 따른다”고 지적했다.

대인관계에 대한 피해의식이 증가하고 강박?불안장애등이 나타나고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심할 경우 공황장애나 우울증 같은 질환이 발생한다.

오 소장은 “세련된 옷차림과 화장, 입 꼬리를 올려 만들어진 미소 이면에는 자아가 배제된 감정노동자의 ‘외로움’이 존재 하는데 현실적으로 자기 감정을 맘껏 드러 낼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다”며 이러한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노동자들이 자아를 표현하는 주기적인 교육과 장소가 제공되어야 하며 직무 매뉴얼도 만들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 소장은 “현재 감정노동자에겐 전화를 끊을 권리도 없고 진상고객으로부터 도피할 권리도 없는 무권리의 상태”라며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감정노동의 폐해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기업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주)KT의 114 업무를 위탁 받아 수행하는 KTNS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콜센터 근무가 어렵다는 것이 알려지고 나서 신규직원을 채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주 서부권 대형마트 관계자도 “1년 이상 계속 근무하는 직원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과잉친절과 무감정으로 대표되는 감정노동의 폐해가 결국 기업의 족쇄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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