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식 충북학연구소장

지난 19~20세기 충북은 축소 지향의 공간 재생산이 이루어진 데다, 지방자치의 결과 충청북도라는 경계가 강조됨으로써 일정 부분 단힌 공간시스템이 자리잡은 것이 사실이다.
충북이 위치한 지역공간이 외부와의 소통에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 예로 한국철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성동이’논쟁에서, 서울·경기지역 유학자는 인간과 물성이 같다는 주장을 폈고, 충청지역은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였다. 전자는 청나라와 서양의 변화를 수용한 논리인 반면, 후자는 급변하는 시대 변화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성리학질서를 고수한 논리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충청지역은 19세기 시대 변화에 뒤쳐져 고립되는 역사 추이를 밟게 된다. 비록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단재 신채호와 같은 혁신인물도 등장하지만, 전체적인 지역 성향은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 단적인 예가 제천을 비롯한 충청도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던 의병투쟁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1896년에 충청도는 남북도로 나뉘게 되어, 충청북도는 바다가 없는 중부내륙도가 되고 닫힌 경계가 고착화되는 행정단위로 자리잡았다. 1896년에 확정된 충청북도의 경계는 전라도나 경상도처럼 충청도 전체를 남북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충청도의 동쪽 내륙을 경계로 삼은 행정단위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충청북도는 20세기 세계 역사가 증명하듯이 바다로 뻗어나가는 해양시대와는 상충되는 지역의 고립성을 태생적으로 안고 태어났다.

충청북도에 주어진 ‘단힌 경계-단힌 공간’은 20세기에 들어와 더욱 확대 재생산되었다. 1905년에 개통된 경부철도는 20세기 근대화·산업화 개발축으로 작용하였지만, 충청북도는 사실상 경부 개발축에서 벗어나 있었다. 1921년에 운행되기 시작한 충북선은 1959년에 가서야 제천까지 확장되었지만, 지역을 근대화·산업화하는 철도 역할보다 지역의 수탈과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기능이 더 강하였다. 그 결과 충청북도는 장지지속적으로 가난한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20세기를 보내야만 하였다.

해방 이후 충청북도는 대한민국의 모범도로 기능하였다. 1980년대까지 청주산업단지 외에는 이렇다 할 산업시설이 없었다. 농업에 의존하는 지역경제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앙정부 의존도 심화, 행정시스템 강화, 편향된 분야로의 지역 인재 진출, 인문과 문화예술에 대한 무관심 등의 부작용을 낳게 되고 그것이 오늘날의 업보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1995년 지방자치제가 본격 시행된 이후 충청북도는 지방정부 주도로 지역 발전을 위해 여러 시책을 추진하면서 충북이라는 지역 경계와 공간을 강조하고 내부 통합과 공동체를 강화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19~20세기 고착화된 ‘단힌 경계-단힌 공간’을 허물지 못하고 재생산한 측면이 있었다.

이것의 극복은 오송역과 같은 사통팔달의 교통망 확충, 글로벌한 축제와 스포츠행사 개최, 대규모의 산업시설 확대 등 외형적인 인프라 확대와 행사만으로론 불가능하다. 먼저 이러한 지역의 역사성과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그 다음으로 자기 중심성을 확보하고, 지역민이 열린 사고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여러 작은 소프트웨어가 구축되어야 한다.

흔히 말하듯 ‘지역이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말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지난 세월 굳어진 경계와 공간의식을 해체해야 한다. 즉, 자기 중심성을 기반으로 한 ‘열린 경계-열린 공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따뜻한 가슴은 지역에 두되, 발과 눈과 귀는 세계로 향해야 한다.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지역 인문학을 육성하고 문화예술을 진흥시켜야 한다. 이 분야는 지난 20세기 충북지역에서 철저히 소외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분야이다. 아니, 오히려 허약한 지역 인문학과 문화예술 기반마저 붕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단언하건데, 이 분야의 회복 없이는 ‘지역이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말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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