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과 아이가 같이 읽으며 인문학으로 다가가는 <랩으로 인문학하기>

이헌석
서원대 법학과 교수

나는 이미 화석이 되어 버린 ‘민주’, ‘인간’ 그리고 ‘인문학’ 같은 단어들의 의미를 여전히 강조하는 꼰대다. 하지만 딸아이는 나의 간절함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 귓구멍에 이어폰을 꼽고 흐느적거리기 일쑤다. 그것도 ‘가곡’이나 ‘R&B’는 그렇다 치고, ‘트로트’까지도 봐 줄 수 있으련만, 이도 저도 아닌 ‘랩’을 따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솔직히 랩을 그저 노래실력 없고, 생각도 없는 날라리들의 헛소리 정도로 생각해 온 터이니, 랩 매니아 딸아이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이해할지 고민스럽다.

이런 고민에 빠진 부모라면 <랩으로 인문학하기>라는 책을 권해 주고 싶다.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랩’과 ‘인문학’을 연결한 제목이 다소는 의아하지만, 중간 쯤 읽다 보면, ‘랩으로도 인문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게 된다. 다만, 우리 같은 노땅들이 갈구하는 엄숙한 인문학적 수준에는 한참 모자란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그저 아이들과 같이 읽으며 공감할 수 있고, 인문학의 육중한 문으로 다가서는 징검다리 정도로 생각하고 편하게 읽으면 된다.

▲ 저자: 박하재홍출판사: 탐
우리나라 랩의 시초는 서태지이다. 서태지가 <난 알아요>와 <교실이데아>라는 랩을 들고 나왔을 때, 당시 기성세대의 반응은 비난일색이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곧 시대적 우상이 되었다. 학교의 철창 속에서 고통 받고 있던 청소년들에게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소리 쳤던 서태지는 분명 영웅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다만 어른들만 몰랐을 뿐이다.

랩 가사를 음미해 보면, 요즘 젊은이들의 머릿속이 훤히 보인다. 랩에서 ‘공부’, ‘고통’, ‘방황’, ‘좌절’, ‘분노’ 등과 같은 키워드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DJ DOC는 <DJ DOC와 함께 춤을>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불만을 유쾌하게 얘기하고 있다. 윤미래는 <검은 행복>에서 ‘유난히 검었던 내 살색’을 노래하며 차별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지만 젊음에는 분노와 좌절만 있는 것이 아니다.

GOD는 <어머님께>를 부르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그렸고,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로 시작하는 첫 소절은 구세대들에게도 애잔함을 준다. 뿐만 아니다. 무모할 만큼 용감하다. 실제로 2008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김디지의 <김디지를 국회로>에서는 세상에 대한 조롱과 해학들이 그들만의 언어와 감성으로 터져 나온다.

결정적으로 리쌍이 <부서진 동네>를 통해 재개발 문제를 소리칠 때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의식이 없다고 비판하던 기성세대들의 편견을 흔들리게 한다. 게다가 MC 스나이퍼의 <솔아 솔아 푸른 솔아>에서 ‘전태일’과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 하는 투박한 소리를 가슴으로 듣게 된다면, 젊은이들의 혼돈과 열정에 박수를 치며 공감하게 될 것이다.

특히나 오늘날의 랩퍼들은 진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에 희망을 느끼기도 한다. ‘21세기의 정의는 동물의 권리까지 포용할 것이다. 정의는 여성을 포용하지 않으려는 남성과, 흑인을 포용하지 않으려는 백인을 설득했다. 이제는 동물을 포용하지 않는 인간을 설득할 차례다. 이미 준비는 되었다’는 책 속의 말처럼 랩은 인종을 넘어 모든 생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은 시종일관 청소년에게 랩을 통해 마음속에 담긴 희로애락을 표출하고, 자신의 삶과 사회에 대해 고뇌하는 법을 이야기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렇지만 B급문화인 랩을 고상한 인문학으로 치장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는 듯하다. 어찌 보면, 인문학이란 것 자체도 그다지 화려하지도 엄숙하지도 않은 그저 인간의 삶을 고민하는 학문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랩퍼들이 던지는 노랫말들 역시 그 자체가 인간의 삶에 대한 고뇌가 묻어 있는 진정한 대중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사 속에서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조롱하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래퍼들에게서 소박한 인문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녀들의 인문학적 소양이 깊으면 좋겠지만, 그런 강박 관념을 가지면 부모는 물론이고 아이들에게도 짐만 될 뿐이다. 항상 진지하고 어렵게 인생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은 좋은 게 아니다. 오히려 짐을 버리고 즐겁게 갈 수 있다면 그것이 현명할지도 모를 일이다. MC 스나이퍼의 랩을 들으면서, 50세가 훌쩍 넘어 버린 내게 20살 시절의 열정이 다시 끓어오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제는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판단할 차례
7,80년대 빈곤한 내 부모
살아온 시대 그때의 저항과 투쟁
모든 게 나와 비례 할 순 없지만
길바닥에 자빠져 누운 시대가 되가는 2000년대
(MC 스나이퍼의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중에서)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