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은 분단국가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한 검증에 직면한다. 진정한 사상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국가보안법의 존치로 입증된다. 국가보안법 7조 찬양·고무 조항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적용돼 왔다. 국가보안법은 이 7조에 대해서까지 형사소송법상의 수사기관에 의한 피의자 구속기간 30일보다 20일이나 많은 50일을 인정하고 있다.

▲ 베를린의 유태인학살 추모공원. <사진=대한지적공사 공식블로그>

생각으로 짓는 죄가 중하다는 것은 거룩한 종교에서나 인정될만한 논리다. 불교에서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가운데 마음으로 짓는 죄, 즉 의업(意業)을 가장 경계한다. 마음으로 짓는 죄가 어찌 몸과 입으로 짓는 죄만큼 무거울 수 있겠냐마는 모든 업이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누구든지 정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다’고 단정한다.

법만 문제가 아니다. 선거 때만 되면 색깔론의 광풍이 이성의 세계를 황폐화시킨다. 보수 앞에는 ‘꼴통’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보수가 아니라면 대부분 북한에 대한 친밀도가 계량화된다. 반북이 아니면 친북 또는 종북인데, 도대체 북한을 추종한다는 종북은 그 경계가 어디인가?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자본주의의 위기로 공존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생각의 스펙트럼이 자유로워진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반세기 전(前)을 살고 있다. 나와 같은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양분법은 적대적 사회를 만든다. 더 큰 문제는 수많은 오인(誤認)의 역사를 만든다는 것이다.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60여 년 전, 오인의 결과는 끔찍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교화시키겠다는 목적으로 결성된 보도연맹은 지역할당제가 있어 1년 만에 가입자 수가 30만명에 달했다. 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흙만 파던 무지렁이들은 “비료를 공짜로 준다”는 말에 속아 보도연맹원이 됐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고 속절없이 초기 후퇴에 들어간 군·경은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1950년 7월25일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는 또 어떠했던가. 미군은 영동읍 주곡, 임계리 주민 500여명을 “피난시켜 주겠다”며 한자리에 모았다. 그러나 쏟아진 것은 무스탕 전투기의 기총소사였다. 당황한 주민들은 쌍굴다리 아래로 숨었다. 그러나 다리 앞 야산에는 기관총이 걸려있었다. 29일까지 이어진 기관총 난사로 영동군에 신고된 피해자만 사망 177명, 부상 51명, 행방불명 20명 등 248명이다. 주민들 중에 인민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청소(人間淸掃)’가 이뤄진 것이다.

더 많은 세월이 흘러 분단으로 인한 피해자와 그 1차 유족들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아픔도 희석될 거라고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추모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릇된 역사는 반복된다.

유태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했던 독일은 베를린 한복판에 ‘유대인학살추모공원’을 만들었다. 무려 1만9000m²의 부지에 우리 돈 366억원을 들여 2711개의 콘크리트 비를 세웠는데, 커다란 관(棺)을 연상시키는 잿빛 비석들은 낮에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단다. 이는 단순한 추모에 그치기보다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끊임없는 자성의 의미일 것이다. 한반도가 아픈 유월이다.

<에필로그>
6.25 민간영웅, 오인으로 가족몰살
‘전장과 여교사’ 실제주인공 김재옥씨의 비극적 삶
인민군 동태제보 승전 기여…훗날 ‘도끼테러’ 숨져

전쟁은 상처 속에서도 영웅을 낳는다. 그 중에는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도 있다. 음성출신의 고(故) 김재옥 교사도 그 중에 하나다. 故 김 전 교사에게는 2012년 10월1일 보국훈장 삼일장이 추서됐다.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국군의 날에 받는 훈장이었다.

▲ 6.25의 민간영웅 김재옥 교사의 삶은 영화와 책으로 통치논리에 활용됐으나 그 역시 오인에 의해 가족이 몰살됐다. 사진은 고 김재옥 교사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전장과 여교사’ 영화 포스터.

음성군 감곡면에서 출생한 김 교사는 충주시 신니면 동락초등학교에 재직하던 1950년 7월6일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교정에 집결하는 과정을 목도한다. 김 교사는 “국군이 차를 타고 다 도망갔다”며 안심시킨 뒤 기회를 틈타 4km 떨어진 곳에 매복 중이던 국군 6사단 7연대를 찾아가 동태를 소상히 설명한다. 국군은 김 교사의 제보를 바탕으로 기습공격을 벌여 400명의 병력으로 800명을 사살하고 90여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린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부대 소대장이었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결과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1963년 10월 강원도 인제군 모 부대 관사에서 일가족과 함께 잠을 자던 중 군 복무시절 부대장에게 앙심을 품고 탈영한 고재봉 상병에게 도끼로 살해당하는 것이다.

고재봉이 원한을 품은 부대장은 이미 전근을 간 상태였으나 새로 부임한 이득주 중령 일가족이 희생을 당한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당시 큰집에 가있어 화를 면한 장남 이훈(61)씨만 극적으로 살아남아 지난해 대신 훈장을 받았다.

전쟁 중에 발생한 오인(誤認)은 아니지만 전쟁이 낳은 민간영웅이 어처구니없이 살해된 극적인 사건이다.

“치유와 화해의 과정 필요”

김 교사의 스토리는 1966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 ‘전장과 여교사(전쟁과 여교사)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김진규와 엄앵란이 주연을 맡았다. 1년 전인 1960년, 6.25 당시 7연대장이었던 김종수에 의해 출간된 동명의 책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1970년을 전후해 전승비, 현충탑도 세워졌고 1990년에는 동락초등학교에 김재옥 교사 기념관도 들어섰다. 그러나 김 교사의 삶은 군부독재 시절의 통치논리와 결부돼 반공교육의 도구로 활용됐다. 단순한 추모의 논리가 이와 같다.

전쟁과 전후 상황은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허석렬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노근리나 보도연맹 민간학살은 엄밀히 말해 오인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인민군에 협력할 일말의 가능성을 우려한 의도된 학살”이라는 것이다.

허 교수는 “그동안 대한민국이 반공국가였고 군부독재를 오래 거치면서 진실이 묻혀버리고 탄압을 받은 측면이 있다. 당사자들이 억울하게 죽었고, 가족들도 희생을 당했다. 민주화 과정 속에서 사회적으로 치유하고 화해하는 과정이 필요했으나 완벽하지 못했다. 이제는 이 문제를 매듭짓고 그런 역사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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