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들의 증언 및 소설화 통해 노근리 사건의 실상 알려
한미 양국 조사, 노근리특별법제정, 평화공원조성까지 이뤄내

 

<프롤로그>
대한민국 국민은 분단국가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한 검증에 직면한다. 진정한 사상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국가보안법의 존치로 입증된다. 국가보안법 7조 찬양·고무 조항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적용돼 왔다. 국가보안법은 이 7조에 대해서까지 형사소송법상의 수사기관에 의한 피의자 구속기간 30일보다 20일이나 많은 50일을 인정하고 있다.

생각으로 짓는 죄가 중하다는 것은 거룩한 종교에서나 인정될만한 논리다. 불교에서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가운데 마음으로 짓는 죄, 즉 의업(意業)을 가장 경계한다. 마음으로 짓는 죄가 어찌 몸과 입으로 짓는 죄만큼 무거울 수 있겠냐마는 모든 업이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누구든지 정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다’고 단정한다.

법만 문제가 아니다. 선거 때만 되면 색깔론의 광풍이 이성의 세계를 황폐화시킨다. 보수 앞에는 ‘꼴통’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보수가 아니라면 대부분 북한에 대한 친밀도가 계량화된다. 반북이 아니면 친북 또는 종북인데, 도대체 북한을 추종한다는 종북은 그 경계가 어디인가?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자본주의의 위기로 공존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생각의 스펙트럼이 자유로워진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반세기 전(前)을 살고 있다. 나와 같은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양분법은 적대적 사회를 만든다. 더 큰 문제는 수많은 오인(誤認)의 역사를 만든다는 것이다.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60여 년 전, 오인의 결과는 끔찍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교화시키겠다는 목적으로 결성된 보도연맹은 지역할당제가 있어 1년 만에 가입자 수가 30만명에 달했다. 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흙만 파던 무지렁이들은 “비료를 공짜로 준다”는 말에 속아 보도연맹원이 됐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고 속절없이 초기 후퇴에 들어간 군·경은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1950년 7월25일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는 또 어떠했던가. 미군은 영동읍 주곡, 임계리 주민 500여명을 “피난시켜 주겠다”며 한자리에 모았다. 그러나 쏟아진 것은 무스탕 전투기의 기총소사였다. 당황한 주민들은 쌍굴다리 아래로 숨었다. 그러나 다리 앞 야산에는 기관총이 걸려있었다. 29일까지 이어진 기관총 난사로 영동군에 신고된 피해자만 사망 177명, 부상 51명, 행방불명 20명 등 248명이다. 주민들 중에 인민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청소(人間淸掃)’가 이뤄진 것이다.

더 많은 세월이 흘러 분단으로 인한 피해자와 그 1차 유족들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아픔도 희석될 거라고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추모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릇된 역사는 반복된다.

유태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했던 독일은 베를린 한복판에 ‘유대인학살추모공원’을 만들었다. 무려 1만9000m²의 부지에 우리 돈 366억원을 들여 2711개의 콘크리트 비를 세웠는데, 커다란 관(棺)을 연상시키는 잿빛 비석들은 낮에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단다. 이는 단순한 추모에 그치기보다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끊임없는 자성의 의미일 것이다. 한반도가 아픈 유월이다. 글/ 이재표

 

 

▲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들은 사건이 일어난 지 50년 만에 미국정부로부터 사과문을 받아냈다. 이제 노근리 사건의 생존 피해자는 2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사진은 노근리 유가족들 가운데 재단 이사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왼쪽부터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 전춘자, 양해찬, 배수용, 한금동 씨다.

“6.25전쟁당시 집을 떠나 쌍굴다리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었다. 쌍굴다리에서 미군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유족들은 50년 만에 현대사의 비극을 세상에 알렸고, 이곳에는 지금 노근리 평화공원이 세워져 있다. 이제 쌍굴다리로 가는 길은 평화와 인권의 길이다.”

노근리사건의 유족인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59)은 20여년 넘게 노근리 문제에 매달렸다. 부친인 정은용 씨(92)가 노근리 사건 생존피해자들의 구술증언을 1994년 소설로 엮어 내놓으면서 세상에 처음 진실을 알렸다.

400여명의 민간인 학살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영동군 황간면에서 유엔군의 일원인 미군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이다. 사건당시 500~600명의 피난민 대열은 미군기의 공중폭격으로 100여명이 희생당했고, 여기서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미군들에 의해 3박 4일 70여 시간 동안 노근리 쌍굴다리에 감금된 채 기관총 및 소총사격을 받아 쓰러져갔다. 총 400여명의 희생자들 가운데 부녀와 어린아이들이 70%를 넘었다.

1999년 AP통신은 이 사건을 집중보도하게 된다. 이후 한미 양국정부는 1999년 10월부터 1년 3개월 간 진상조사를 실시한 후 노근리 사건 50년 만인 2001년 1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노근의 사건의 존재를 인정하며 ‘유감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구도 이사장은 “소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았다. 성명서는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인 유족들이 반세기 전의 ‘기억’을 가지고 미국과 이른바 ‘기록전쟁이자 기억전쟁’을 벌인 승리의 전리품과도 같았다”고 회고했다.

유족들의 끈질긴 싸움

2004년 노근리사건특별법이 공포됐고, 국비 191억원을 들여 사건의 현장인 쌍굴다리 인근132,240제곱미터(4만여평) 부지에 노근리평화공원을 완성하게 된다. 2006년 착공해 2011년 10월말에 완공됐다.

쌍굴다리에는 포탄의 흔적들이 또렷이 새겨져있다. 전쟁으로 인한 비극의 현장이자 냉전시대를 살았던 한국과 미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한 민간인 실상사건은 225건이나 된다. 한국전쟁 때 한국의 경찰, 군대 등에 의해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들도 적지 않다.

노무현 정부는 진실화해평화위원회를 만들고 과거사 정리 사업을 벌였지만 이마저도 정권이 바뀌면서 활동이 정지상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근리 사건은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진실규명을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과거사를 통해 미래를 이야기하는 선례적인 사건이 됐다.

노근리 평화기념관 전시장 입구에는 “인권회복은 수많은 이들의 땀과 희생으로 이뤄지며, 평화는 누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기록돼 있다. 평화공원 기념관에는 노근리 사건을 담고 있는 각종 문서자료 외에 노근리 사건 생존피해자와 가해미군의 증언자료, 피해자 사진, 유골및 당시 미국이 발포했던 총알까지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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