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솔길...임 병 무

청풍명월(淸風明月)이란 충청도의 정서를 대변하는 말이다. 정조 임금과 규장각 학사 윤행임(尹行任)이 팔도의 기질을 4자 단구로 평하는데 충청도를 그렇게 표현하였다. '맑은 바람 밝은 달' 그것은 소백산맥과 차령산맥을 스치고 지나가는 공해 없는 바람이며 갈지(之)자 양반걸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남한강, 금강의 여유있는 모습이다.

자연풍광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도 영향을 준다. 넉넉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포용하고 사소한 일로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며 고준한 소백의 선비정신으로 변덕스런 세태를 경계한다.

'아버지 돌 굴러가유...'하는 식의 비유가 말해주듯 말이 느리다고 해서 행동이 덩달아 느리고 판단이 느슨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급해도 호드득 깨 방정을 떨지 않고 틈이 난다고 해서 잔꾀를 부릴 줄도 모른다. 우직하리만큼 초발심을 밀고 나가다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말도 더러 듣는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가는 순발력은 다소 무딜지 몰라도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의 기준은 서릿발같다.

남들이 '멍청도'니 '핫바지'니 깔보거나 비하해도 '그려려니' 하고 세태에 순응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수수팥떡같이 만만해 보이나 유능제강(柔能制剛)을 덕목으로 꼽으며 슬기롭고 탄력있게 살아온 터에 푸대접을 받을지언정 밉상은 받치지 않았다.

매사에 껄그롭지 않은 포용성을 보이나 일단 유사시에는 국난 극복의 대열에 앞장섰으니 충절의 고장이라는 찬사가 자화자찬만은 아니다.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등은 호서학맥의 중심축에 서 있던 충청도 선비들이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김유신, 임진왜란을 극복한 이순신, 병자호란을 이겨낸 임경업 장군 등 청사에 빛나는 대표적 무인들이 충청도 출신이다.

일제의 침략에 맞선 자주독립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3․1운동 당시에도 충북출신은 민족대표 33인중 6명이나 되었으며 청원 북일 출신의 손병희 선생은 민족대표 중 으뜸 자리(首位)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천 출신의 의병장 유인석은 을미사변 후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의병활동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언뜻 보면 굼뜨고 느려터지고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해도 원칙이 흔들리는 일은 용서치 않았고 적당히 타협치도 않았다. 그런 선비정신의 인자(因子)를 갖고 있기 때문에 도민의 힘이 결집되어 문장대 온천개발을 막았고 고속철 오송역을 유치하였으며 오송벌에 꿈의 '바이오토피아'를 건설하고 있다.

신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이 가시화 된 것은 이러한 충청도의 축적된 역사적 힘에 기인한 것이다. 정부의 지방분권 정책 이전에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충청도는 그럴만한 지정학적, 역사적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었다. 충청도의 힘이 다시 여기에 응집된 것이다.

청주는 신라의 작은 수도 서원(西原)이었으며 한성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공주로 천도한 후 다시 부여로 수도를 옮겼다. 이성계는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의 터를 잡았고, 그래서 대전을 가리켜 일명 중도(中都)라고 부른다. 충남 신탄진과 경계한 현도(賢都)는 ‘어진 자의 도읍’이다.

역사에는 우연과 필연이 있다. 오늘날 신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은 역사의 우연이라기 보다 필연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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