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에서 재활용산업으로 인정…이면에는 범죄자 취급했던 과거
넝마주이, 독재시대 도시빈민의 자화상…지금은 노인빈곤 반영

양아치【명사】
(1) 품행이 불량스러운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2) 넝마나 헌 종이 등 돈이 될 만한 것을 줍는 사람.
(3) ‘거지’를 속되게 이르는 말.
출처 : 고려대학교 한국어 대사전

▲ 청주의 한 고물상에서 작업자가 고철을 나르고 있다. 커다랗게 쌓여 있는 종이원단은 구입한지 수 개월이 지났지만 가격이 맞지 않아 출고를 못하고 있다.
새벽종이 울리면 너도 나도 일어나 알뜰살뜰 일해야 했던 시절 ‘넝마나 헌 종이 등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줍는 사람’을 가리켜 ‘양아치’라 불렀다.  버릴 물건은커녕 기본적인 물자조차 부족한 시절에 생산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니 부정적이었던 의미는 아예 고착돼 더 나쁜 의미로 바뀌었다. 현재는 특정한 외모를 하거나 행실에 빗대 이 말을 사용한다. 더 이상 ‘고물상’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양아치’라 부르지도 않는다.  ‘자원 재활용’ 분야가 없어서는 안 될 산업으로 자리 매김한 지금은 ‘고물상’이라는 말도 옛말이 된지 오래다.     

양아치에서 고물상으로, 고물상에서 자원재활용산업으로 호칭이 바뀌는 과정에는 현대사의 질곡이 여과 없이 담겨 있다.

1993년 8월 31일 ‘고물영업법 폐지 법률안 제안’이라는 기사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 내무부는 31일 현재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는 ‘고물영업법’을 폐지하는 내용의 법률 안을 제안했다. 이는 생활 여건의 변화로 고물영업에 관련된 장물 거래 위험이 희박한데다...... 고물영업법 폐지안이 정기 국회에서 통과되면 내년부터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고물영업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기사를 통해  1963년 1월에 ‘고물영업법’을 제정한 박정희 정권이 고물상을 어떤 존재로 바라봤는지 미뤄 짐작 할 수 있다. 고물의 출처를 절도로 의심하고,  고물상은 장물을 취급하거나 절도를 할 것 같은 잠재적 범죄자로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고물상’은 관할 경찰서장의 하가를 받도록 했다. 이런 상황은  법이 폐지된 1993년까지 계속됐고 그 이후부터 정부나 경찰의 허가 없이도 고물상을 운영할 수 있게됐다.

박정희 정권은 ‘고물영업법’을 개정한 뒤 바로 넝마꾼들을 ‘국토재건대’(이하 재건대)에 편입시켜 관리했다. 당시 재건대의 명분은 깡패소탕 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경향신문 1966년 9월 5일 7면엔 실린 서울 노량진동 119재건대 소속  조성기씨가 ‘가난해도 긍지는 재건대’라는 기고 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기사에서 조 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사회인들은 우리를 '양아치' '거라시'라고들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누가 이 말을 만들었는지 몰라도 우리들은 그 말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5.16이후 정부는 우리에게서 양아치라는 말을 면해주고 재건대라는 새로운 칭호를 줬다. 글자 그대로 얼마나 신성한가?”

그러나 재건대는 깡패도 잡아넣었지만 넝마주이, 거지 등 소외계층 젊은이들까지 함께 모아서 도로 개설과 같은 국가 사업에 강제로 동원했다.

이런 상황은 전두환 정권까지 이어진다.  ‘깡패소탕’이라는 명분은  ‘사회정화’로 바뀌었고, ‘재건대’라는 조직은 ‘근로 자활대’대로 바뀌었지만 그 내용은 별반 바뀌지 않았다. 이 당시 도시 빈민의 상징인 이들 넝마꾼들은 ‘삼청교육대’의 1차 표적이 되기도 했다.

고물상, 문학의 소재에서 공동체까지
“강남이 재개발되면서 철근이라든지 고철이 천문학적으로 쏟아져 나오니까 난지도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강남으로 다 모여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매일 소위 말하는 왕초라는 사람의 착취가 심했어요. 그걸 보고 이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넝마공동체를 만들어 식사비만 빼고 나머지는 전부 가지는 식으로 만들어놔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죠.”

1986년 헌옷과 폐지를 주어 생활화는 넝마주이의 공동체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들과 함께 자립공동체를 꿈꾸며 살아가는  윤팔병 대표가  설립 당시를 회상한 말이다.
윤 대표가 넝마공동체를 만들게 된 배경으로 지목한 난지도.  이곳은 1978년부터 1993년까지 15년 동안 서울시 공식 쓰레기 매립장으로 사용됐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482번지. ‘도시빈민’이라는 이름으로 갈 곳 없는 4000여명이 모여 살았다.

이들은 음식물 찌꺼기가 부패하여 썩어가는 냄새와 메탄가스 등 유독가스가 풍겨 나오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움막을 짓고 고물을 찾았다.

정연희는 이곳의 실상을 소설  ‘난지도’로 옮겼고, 르포작가 유재순은 냄새나는 그 매립장에서 2년 정도를 지내며 ‘난지도 사람들’을 발표했다. 유재순 작가는 대법원으로부터 표절 판결을 받은  전여옥(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씨의 저서 ‘일본은 없다’의 원 저자이기도 하다.

‘풀무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철환 씨는 고물상을 운영했던 아버지와 함께 한 유년시절의 기억을 모아 ‘행복한 고물상’을 펴냈다.

도신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와 넝마주이
“노동자가 예수다” 인명진 목사와 1974년 넝마 생활

▲ 정진동 목사(아래)와 인명진 목사가 지금의 새동네 부근에서 고물을 줍고 있다.
▲ 정진동 목사를 따라 넝마주이에 나선 인명진 목사(앞)와 조순형 전도사(가운데)가 청주기계공고 인근 무심천 둑방에서 기념 촬영한 모습
   
평생을 세상보다 ‘낮은 곳’을 찾아 기도해 온 거리의 목회자 고 정진동 목사도 한때 넝마주이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74년 정진동 목사와 청주도시산업선교회는 청주시청 청소부 투쟁을 지원했다.  당시 청소부들은 해가 뜨면 출근해 해가 질 때 까지 일했고 처우는 매우 열악했다.

청소부들의 투쟁이 승리로 끝나자 정 목사가 속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에 압박이 가해졌고 교단은 정 목사에게 도시산업선교 활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고 조순형 전도사는 회상했다. 결국 교단의 지원도  중단됐다. 이때 정 목사는 “노동자를 통해서 예수를 보았다. 노동자가 예수다. 목회자가 예수를 떠날 수 없는 일”이라며 넝마주이를 해서라도 노동자에 대한 산업선교 활동을 지속했다.

이 소식이 서울의 NCC(전국기독교협의회)에 전해졌고 인명근(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목사도 이 소식을 접했다. 소식을 접한 인 목사는 정 목사와 함께 하겠다며 청주로 내려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함께 넝마주이를 했다고 조순형 전도사는 전했다.

조순형 전도사에 따르면 정 목사는 넝마주이 4∼5명으로 부터 납치도 당했다. 이들은 까치내 인근으로 끌고 가 몽둥이로 폭력을 행사하려던 차에 정 목사를 폭행하려 했다는 것. 이때 정 목사가 “죽더라도 내 말좀 한번 들어보고 죽이라”며 이들에게 말했고 이들이 정 목사의 주장을 들어 줬다.

이어 정 목사가 이들에게 넝마주이를 하는 이유와 약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 했다. 정 목사의 말에 감복한 넝마주이는 자신들의 거처인 현양원으로 모시고 갔고 이후 도시신업선교회 활동을 같이 했다고 조 전도사는 전했다.

한편 거리의 목회자라 불리며 충북지역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정진동 목사는 2007년 7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후 충북지역의 노동운동가와 사회단체는 추모사업회를 구성하고 ‘호죽인권상’을 통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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