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백제유물전시관, 삼년·남성골산성 등 답사
내달 9일엔 신라시대 불교문화에 대해 배울 예정

2013 청주역사문화기행 3

지난 3월부터 시작한 ‘2013 청주역사문화기행’답사단은 지난달 태백산맥 문학관 문학기행에 이어 이달에는 충북 도내 삼국시대 삼국정립의 각축장들을 둘러보았다.

답사단 일행은 12일 청주 백제유물전시관(신봉동 백제고분군과 유물), 보은 삼년산성(신라 전초기지), 부강 남성골산성(고구려 남진 성채)을 차례로 답사하며 치열한 각축전을 펼친 삼국시대를 상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 백제유물전시관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2013 청주역사문화기행’답사단 일행들.

“‘신봉동배’ 상품화 하지 못해 아쉬워”

첫 일정으로 백제유물전시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날도 변함없이 해설사로 재능기부를 해 준 강태재 충북참여연대 상임고문은 “어버이 날 기간이라 답사단 일행이 많이 참석 못 해 조금은 아쉽다”고 운을 뗀 후 “삼국 가운데 청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백제”라면서 “청주는 서울에서 세력을 키운 백제가 남하하는 전초기지이자 전진기지였다”고 강조했다.

이어 강 고문은 “서기 63년 경 부터 청주는 백제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며 “6세기 중반 신라가 북진하기까지 오랜 기간 백제의 영역이었다. 청주, 충주, 공주는 삼국이 서로 전진기지를 삼으려고 했는데 특히 청주는 유독이 각축이 심했다”고 덧붙였다. 

청주 신봉동백제고분군 (사적 제 319호,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은 무심천 가의 낮은 구릉에 있는 백제권역 최대의 무덤 유적이다.  이곳 구릉 일대는 4~6세기에 만들어진 무덤이 떼를 이루고 있다. 이들 무덤들은 1982년부터 여러 차례 발굴 조사되었는데, 백제가 이 지역을 경영할 때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전체적으로 움무덤이 밀집되어 분포되어 있으며, 구릉의 위쪽에는 돌방무덤, 중턱에는 대형 덧널무덤, 아래쪽에는 화장표로 여겨지는 작은 무덤들이 분포한다. 무덤에서는 각종 토기와 철제 무기, 말갖춤, 농공구료, 꾸미개들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을 통해 당시 백제는 청주를 기반으로 하여 한강과 금강 이어 백두대간 넘어 낙동강 유역에 이르는 활발한 대외 활동이 이뤄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들 무덤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질과 양에 각자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신분에 따라 부장되는 유물도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고분군의 북쪽과 서쪽으로 이어지는 봉명동, 송절동, 화계동의 구룡에도 이곳보다 빠른 시기의 많은 고분군이 분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신봉동백제고분군에서 출토된 손잡이 잔을 보고 강 고문은 “이 손잡이 잔은 특유의 모양을 하고 있어 신봉동배(新鳳洞俳)라고 하는데 곡식의 양을 측정하는 양기로 보는 박사학위 논문까지 발표되었다”고 언급 한 뒤 “개인적으로 이런 가치 있는 잔을 문화관광부나 충북도에서 왜 상품화 하지 않았는지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 강태재 충북참여연대 상임고문이 백제유물전시관 뒷산에서 ‘2013 청주역사문화기행’답사단 일행들에게 청주 인근의 산맥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홍수로 4분의 3 유실된 삼년산성 

백제유물전시관 관람을 마친 답사단 일행은 이어 신라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보은 삼년산성으로 향했다. 삼년산성(사적 제 235호,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은 신라 자비마립간 13년에(470) 축조되었고, 소지마립간 8년(486)에 아찬 실죽이 일선군 장정 3천명으로 동원해 대규모로 수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축성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완성하여 삼년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가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중요한 전초기지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삼국통일 전쟁 때 태종 무열왕(654~661)이 당나라 사신 양문도를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했으며 고려 태조 왕건(재위기간 918~943)은 이 성을 점령하려다 크게 패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석축산성으로 둘레 1680미터, 최고높이 22미터, 폭 8~10미터에 이르며 동서남북 4개소 문지와 약수의 건물터가 남아 있고, 산성 인접 지역에 대규모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삼년산성은 반원형 곡성(치성)과 성내 배수를 위한 수구 등 특이한 축성양식과 축성 및 수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어 국내 고대 축성법 연구에 중요한 산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옥필, 유사암, 아미지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김생의 글씨체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김현수 문화관광 해설사는 “수레가 지나간 자국이 남아 있는 산성은 국내에 이곳 밖에 없다. 1980년대 대홍수로 산성의 4분의 3이 유실 되었다”면서 “잘 관리하고 보수했으면 유네스코에 등재 할 수 있었기에 큰 아쉬움이 남는다”고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이곳 산성을 유네스코 등재 할 것을 제일 먼저 제안한 강 고문도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가치 있고 중요한 성을 홍수가 난 후 제일 먼저 보수공사를 했다”면서도 “하지만 가장 엉터리로 보수공사를 해 버려서 결국 유네스코에 등재를 했지만 유보가 되었다”고 속상해 했다.

김 해설사에 따르면 유네스코 관계자들이 말하길 보수공사를 할 때 이곳의 돌들로 다시 공사를 했어야 했는데 다른 곳에서 돌을 공수해 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는데 너무 인조적으로 만든 지적이 있었다.  

▲ 2013 청주역사문화기행’답사단 일행이 김현수 문화관광 해설사로부터 삼년산성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전략적 요충지, 남성골 산성

답사단 일행은 이날 마지막 답사 일정으로 고구려의 최남단 영역이라고 일컬어지는 부강 남성골 산성을 찾았다. 남성골 산성(충북 기념물 제 139호,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산 25, 26-1, 27)은 남성골 마을 뒷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산성으로 해발 106미터 봉우리에서 서쪽으로 낮아지다가 다시 솟아오른 봉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2001년의 시굴조사와 2001~2002년의 발굴조사 결과 서쪽 능선부에서 목책을 세웠던 유지와 함께 저장시설로 보이는 많은 구덩이들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4~5세기의 백제 토기와 함께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흑갈색의 고구려 토기편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물들로 보아 남성골 산성은 당초에는 백제에 의해 사용되다가 5세기 후반 경에는 고구려에 의해 점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남성골산성은 고구려 유물이 출퇴 되는 금강유역의 산성으로 삼국시대의 영역변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산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강 고문은 “이곳은 옛날 삼국시대 때에 치열한 각축전이 펼쳐졌던 전략적 요충지였다”며 “지금은 경기, 전라, 경상, 충청의 물류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강태재 충북참여연대 상임고문 남성골 산성 올라가는 데크에서 남성골 산성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편 <충청리뷰>와 충북참여연대가 주최하고 서울고속이 후원하며 충북참여연대 문화위원회가 주관하는‘2013 청주역사문화기행’ 답사단의 다음 일정은 내달 9일이다. 이날에는 국립청주박물관, 보살사, 탑동오층석탑, 용화사 등을 답사하며 신라시대 서원경성과 불교문화에 대해서 알아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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