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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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날들
  • 육정숙
  • 승인 2004.05.29 00:0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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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던 모든 것들이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인가 잃어버리고 온 듯한 허전함에 허기가 찾아든다. 나는 가끔 이렇게 흔적을 찾으며 세월을 느껴 간다.

무심천에 벚꽃이 피었다 지면 흔적처럼 까만 버찌가 달린다. 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여드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잘 익은 버찌 한알 따서 입에 넣었다가 시고 떫은 맛에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어릴 때의 그 맛이 아니었다. 요즘은 사시사철 모든 과일들이 흔하다. 제철이 아니어도 달고 맛나다. 타고난 모습 또한 귀골이다.

예전엔 봄이 한창이어야 딸기 구경을 하였고, 한 여름이 되어야 수박, 참외, 오이 맛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기다림 속에서 설렘을 알았고, 설렘 속에서 그리움을 사랑으로 익혀갈 줄 알았다.

요즘아이들은 편하고 좋은 세상에 길들여져 어쩌면 그런 것들이 시시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을 듯 싶다.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순수하다. 공부라는 고삐를 풀어 놓고,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닐 수 있도록 해주면 버찌도, 오디도 따먹으며 입 언저리가 흑 자주 빛으로 물들어도,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도 마냥 좋아 하리라. 그 옛날 산과 들을 뛰어 다니던 어릴 적 친구들이 무심천 맑은 물로 꽃잎처럼 떠간다.

밤새도록 종성인 검정 고무신 꿈을, 정순인 예쁜 책가방 꿈을 꾸며 밤잠을 설쳤어도 공부시간에 졸지 않았단다. 오늘 엄마가 장에 가시는 날이기 때문에 가슴이 설렌단다. 그들은 매일 십여 리길을 걸어서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이다. 공부가 끝나면 보자기에 싼 책을 허리춤에 질끈 동여 매고 한 걸음에 집으로 내달리곤 했다.

배미실재에선 한낮에 뻐꾸기가 울었다. 뻐꾸기가 울면 종성인 시집간 누나를 기다렸다. 설레는 마음에 뛰어 가다 발에 땀이 나서 검정 고무신이 벗겨지면 발바닥에 흙을 묻힌 뒤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달려갔다. 사립문이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으면 금새 시무룩한 얼굴이 되고 만다. 혼자 부뚜막에 걸터앉아 무장아찌 반찬 놓고, 보리밥에 물 말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곤 노란 주전자 달랑달랑 들고 사립문을 쏜살같이 빠져 나갔다.

오후 한나절! 검둥이가 팔자 좋게 낮잠을 자던 마을 고샅, 종성이가 달리고 병재가 그 뒤를 따라 뛰었다. 정순이도, 금도도 모두 악바리같이 뛰어갔다. 말구리 벚나무를 향해 달렸다.

배미실재에 걸터앉아 졸던 뭉게구름, 가는 허리 하늘하늘 흔들던 장다리꽃도 덩달아 신이 났다. 싱그러운 바람결에 아이들은 푸른 나무가 된다. 대롱대롱 매달린 버찌가 되었다. 유월의 바람 속에는 달콤한 내음이 담겨있다. 유월의 아이들에게선 버찌향내가 났다. 얼굴에, 손에 옷에 버찌물이 까맣게 들어도 좋다. 노란 주전자 속에서도 버찌들이 가득 모여 송알송알 꿈을 꾸고 있다.

한 알의 버찌엔 아이들의 바람이 들어있다.
어머니들은 요술쟁이였다. 버찌는 어머니 손에서 검정 고무신으로, 빨간 책가방이 되어 아이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아이들 가슴은 늘 사랑이, 기쁨이 충만 해 있었다. 유월의 숲에서 뻐꾸기 울면 아이들의 웃음소리, 농익은 버찌향이 숲을 가득 채웠다. 한 줄기 바람과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장다리 꽃 대궁처럼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어떠한 힘으로도 변질 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자연이다. 세월 속에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는 것 같지만 우리는 늘 변함없이 사랑의 빛에 가득 채워져 있다. 살아오는 동안 가장 아름답고 행복 했던 때가 아마도 유년시절 인가 한다. 거기엔 젊어서 고운 어머니가 계셨고, 버찌 따던 아이들도 있었다. 꿈과 희망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던 곳. 자연의 사랑이 듬뿍 내리던 유년의 강가!

이제 중년의 가슴으로 그리움이 날아들어 둥지를 틀었다. 말구리 오솔길로 딸랑딸랑 소 방울 소리 아득히 들려오고 유월의 밤, 들 꽃 핀 강 언덕으로 달빛이 소리 없이 찾아 왔다. 나는 지금 한 달음에 달려가고 있다. 바람처럼 흐른 세월저편, 유년의 강 언덕으로.

 

육정숙 님은 푸른솔 문학회원이며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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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02 11:01:27 , IP:*****
여나 무살 또래 몇 놈이 산으로 몰려가
버찌를 질역이 나도록 따먹고는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밀 서리를 해다가
밀 때기를 시샘하며 실 컨 먹고
도랑물을 들이키고 나니
배도 부르고 노곤하여 퍼져서 누웠는데
지나가던 어른이
"이놈들아 뻣 먹고 밀 때기 먹으면 뻣는 겨"
배가 더 불러 오는 것 같고 속이 미식거리고
나 죽게 되었다고 집으로 달려갈 수도 없고
옆으로 돌아눕는 척
몰래 눈물을 찍어내고 처 다본 하늘이

이정골사람 2004-06-04 23:55:00 , IP:*****
말없이 다가선 그대는 우리에 현실에 삶을
과거와 변화된 모습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모르고
자라는 꿈과 이상을 주는 아주 오래전 사랑방에서
들려주던 그런 시절에 향기를 느끼게 하여 주는군요
지난 시절 잊을 수 없는 것이 40대 인것 같은데
님도 그렇겠지요
참으로 오랫만에 지나온 시절을 회상할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동막골 2004-06-01 16:21:55 , IP:*****
곱고 향수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옛 추억을 더듬는 글
잘 감상 하였습니다.
더욱 더 정진하시고 좋은 글 많이 부탁합니다.
즐감 하였습니다.

검정고무신 2004-05-30 23:29:05 , IP:*****
한창 내달릴때 검정 고무신이 미끈하고 미끄러지;지요. 그러면 발에 흙을 묻혀 신고 또 뛰어 놀지요....
아 아련한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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