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에 공개된 고용관계의 갑을 관계
최저임금 요구했더니 돌아온 건 폭력뿐

갑을병정’, ‘신유술해’. 많이 들어본 말이다. 이 말은 ‘10간 12’지에 나오는 말이다. 이전에는 ‘갑을병정’은 우열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다. 단순히 순서를 나타내는 말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과 ‘을’은 지위와 계급을 나타내는 말이 됐다. 갑은 ‘임자’ 혹은 ‘소유권자’를  '을'은 ‘계약자’, 혹은 ‘도급자’를 상징하는 기호가 됐다.

최근 ‘갑을관계’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분노가 표출됐다. 대한항공 여승무원 사건과 프라임베이커리 회장 사건으로 달아오르고 남양유업 사건에서 메가톤급 파장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고용관계로 성립되는 노동시장에선 고용주가 ‘갑’, 노동자가 ‘을’이다. 자본주의가 형성된 산업혁명 초기부터 그랬다. 그리고 이 관계는 몇 백년이 경과한 지금도 변치 않았다. 123주년 세계 노동절을 즈음해 청주노동인권센터는  노동시장의 ‘갑을관계’를 엿볼 수 있는 사례를 공개했다. 그중에서 몇 장면을 정리해본다 / 편집자

▲ 지난 5월 1일 민주노총이 주최한 123주년 노동절 기념집회가 청주체육관 앞에서 열렸다. 이날 민주노총은 노조탄압을 중단 할 것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할 것을 요구했지만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다.

같은 ‘을’이라도 평등하지 않았다. 대기업의  정규직 ‘을’과 중소영세 사업장에 존재하는 ‘을’은 결코 같지 못했다. 앞의 ‘을’은 형식상이라도 근로기준법의 햇살이 존재했지만 뒤에 있는 ‘을’에게는 그늘만 있었다.

도내 모 대기업의 한 사내협력업체. 지난해 말 이 회사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 6명은 회사로부터 “(회사를)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유는 작업공정의 일부분이 없어졌다는 것. 근로기준법의 정리해고에 해당했지만 회사는 법에 정해진  정리해고 절차 중에서 어떤 것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에겐 법의 보호는  멀었고 주먹만 가까웠다. 회사의 말 한마디에 항변조차 못하고 떠나야만 했다. 

여러 식당이 공동으로 투자해 설립한 공동 주차장에서 일했던 주차경비원 김(59세) 씨.  김 씨는 출퇴근 시간을 어기는 법도 없이 열심히 일 했다. 그런데 한 식당주인에게 밉보였는지 그 주인은 김 씨에게 그만 두라고 했다. 김 씨는 그러지 못하겠다고 답했다. 그 다음날 식당 사장은 관리실에 있던 주차관리원의 소지품을 전부 밖으로 꺼내 놓았다. 60세가 다 된 김 씨는 그 날의 모욕감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국내 최대 업체인 삼성그룹의 모 협력업체는 근로기준법 자체를 아예 무시했다. 이 회사는 의무 가입사항인 ‘4대 보험’도 가입하지 않았다.  물론 법으로 정해진 ‘주휴수당’ 도 지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퇴직한 여성노동자에게 아이 양육을 위해 휴직한 기간 만큼  퇴직금 계산에서 빼겠다며 서명을 요구 했다. 이 여성노동자가 서명을 하지 않자 한 달이 넘도록 퇴직금을 주지 않았다. 이 노동자는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부에 진정을 넣었으나 회사는 아랑 곳 없이 전화로 협박을 일삼았다.  

용역회사 소속으로 다른 회사에 파견돼  청소 업무를 하던 여성노동자 신 모씨. 청소를 하던 중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허리디스크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산재 처리는 꿈도 못 꾸고 없는 살림에  자비로 치료를 마쳤다. 치료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가 보니 그 자리에는 다른 여성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이미 회사는 신 씨를 퇴사 처리한 뒤였다. 산재처리와 다친 것에 대한 보상은 커녕 회사는 치료비의 절반만 주며 생색을 냈다.

국가기관도 비정규직에 대한 횡포는 별 반 다르지 않다. 도내 모 지자체 주민센터에 근무하는 노동자 윤 모씨는 계속해서 6년 동안 일했다. 하지만 항상 10개월의 단기근로계약만 맺었다. 그리고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2개월~3개월 정도를 쉬었다가 다시 일하기를 반복했다.

비정규직이라는 낙인을 찍어 1년 근로 미만은 퇴직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근로기준법의 허점을 이용해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한 꼼수를 부린 것이다. 

회식장에서 이 네 개 부러진 60대 노동자

청주공단 모 반도체 업체에서 청소용역업체 노동자로 일하는 오 모씨. 그의 나이는 60세. 그는 수년이 넘게 이 청소용역업체에서 일했다. 노동절을 앞두고 모처럼 회식자리가 마련됐다. 분위기도 좋았다. 오 씨는 이 자리에서 편안하게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내 놨다. 하나는 불리하게 변경된 특근 체계를 개선했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최저임금 인상분 만큼 적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느 하나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근로기준법상 당연히 준수해야 될 사항이었다. 그러나 오 씨는 끝내 말을 마치지 못했다.

오 씨가 말을 이어가던 중에 그 보다 나이 어린 용역업체의 소장이 상을 내리쳤고 병과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업체의 소장은 주먹으로 오 씨의 얼굴을 가격했다. 오 씨는 바닥으로 쓰러졌고 용역업체 소장은 쓰러진 그를 발로 짓밟았다. 자리에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타 오 씨는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러나 용역업체 사장은 다시 오 씨의 뒷 머리채를 잡고 벽에 내리쳤다. 오 씨의 치아 4개가 금이 갔고 병원 진료 결과 4개 모두를 발치해야 한다는 의사의 처방을 받았다.

그러나 오 씨는 현재 이 용역업체 소장에 대해서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노동절을 앞두고 발생한 나이 어린 ‘갑’의 폭력에 나이 든 비정규직 ‘을’의 얼굴은 피범벅이 됐지만 세상은 여전히 조용했다.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호받지 못한다”
2614건 상담, 청주노동인권센터가 말하는 ‘을’ 들의  현실

청주노동인권센터(대표 김인국 신부, 이하 인권센터)는 2010년 7월 28일 설립된 이후 총 2,164건의 상담을 진행했다. 인권센터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곳을 찾는 이들의 대부분은 사내 협력업체, 사회서비스 부문, 마트, 식당 등 중소영세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이 센터를 주로 찾아오는 이유는 임금체불, 해고 등 인사 상 불이익, 산업재해와 같은 먹고 사는 문제들과 직결된 원초적 영역이고 이에 반해 휴가나 부당노동행위와 같은 더 높은 차원의 권리구제를 위한 발걸음은 적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여전히 충북지역의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실정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인권센터측은 설명했다.

세부적인 상담유형별을 살펴보면 임금체불 28%(603건), 해고 등 인사 상 불이익 16%(346건), 산업재해 11%(239건), 휴일/휴가 5%(108건), 노동조합 조직운영 5%(96건), 실업급여 3%(71건), 부당노동행위 3%(67건), 근로시간/휴게 2%(47건), 기타 27%(586건) 순이었다.

인권센터는 충북도내에서 특히 취약계층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에 대한 행정기관의 역할과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노동시장에서 소외 돼  갈 곳 없는 취약계층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부가 관리감독을 철저하게 수행해야 하며 지역 시민사회도 노동인권을 중요한 기본권으로 생각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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