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국교·전화국 옛 명칭…남궁병원 폐업, 적십자는 이전
서문시장, 삼겹살거리 변모…시군통합으로 사라질 청원군

1990년 제작 추정 방향표지석 ‘격세지감’
‘어제의 빨간 구두는 여전히 빨간 구두이지만 똑같은 구두는 아니다.’ 내용을 정확히 옮겼는지 자신은 없지만 1982년 동녘이라는 출판사에서 ‘편집부 지음’이라는 저자로 출간된 <철학에세이>가 제기한 명제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던 이 책은 ‘사물은 변화 발전한다’는 변증법과 유물론을 다양한 일화와 사례를 들어 풀이했다.

자신의 이름을 넣어 똑같은 명제를 만들어보자. “어제의 ○○○는 여전히 ○○○지만 똑같은 ○○○는 아니다.” 개명을 하기 전에야 이름은 그대로이고 하루아침에 용모가 눈에 띄게 달라질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여러분은 시시각각 늙고 있으며, 생각의 변화로만으로도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까지 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고린도후서 5장17절의 내용이 그러하다. 철학에세이가 제기한 명제는 ‘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변화하며 머물러있지 않다’고 설파한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과도 같은 맥락이다. 어려운 얘기를 늘어놓을 것도 없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 말해서 무엇 하랴. 이명박 정부 5년은 강산이 인위적으로 천지개벽할 수 있음을 실증했으며, 도로를 낸다, 아파트를 짓는다며 산 하나쯤 뭉개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충북도청 4거리 인도 위에 오래된 방향표지석이 하나 있다. 수많은 보도블록 가운데 박혀있던 60×60cm 오석(烏石)이다. 녹색으로 칠해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지금은 인도를 투수콘으로 다시 포장했으나 이 표지석은 귀퉁이가 깨어진 채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실효성이 있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표지석이 가리키는 방향만 보면 이미 존재의 의미를 잃었다. 지금까지 제거되지 않고 남아있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북쪽으로는 시청과 상당공원이 있다고 돼있다. 남쪽으로는 석교육거리와 남궁병원을 가리키고 있다. 동쪽으로는 적십자사와 중앙국교가 있고, 서쪽으로는 청원군청과 전화국, 서문시장이 있는 것으로 표시돼 있다.

얼추 맞는 것 같지만 남궁병원은 건물 자체가 없어졌고 대한적십자 충북지사는 휴암동으로 옮겼다. 전화국은 민영화돼 지금은 KT로 이름이 바뀌었고, 초등학교는 국민학교가 됐다. 그나마 중앙국교는 2015년 이전할 계획이다. 청원군도 내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청주청원통합시가 출범함에 따라 역사의 뒤란으로 사라질 것이다. 

도대체 이 표지석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시청 요로에 묻고 또 물었지만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도로를 관리하는 청주시 상당구 관계자는 “표지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우리는 도로나 인도의 유지보수업무만 담당한다. 세월이 흘러 내용에 오류가 있지만 딱히 철거계획도 없다”고 말했다.

청주시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오래 담당했던 이동주 전 도시교통국장은 “1990년에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이 전 국장은 “1990년 10월 청주를 비롯한 충북일원에서 71회 전국체전이 열렸다. 그때 수영장,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등을 지었고 외지인들을 위해 도로안내시설을 곳곳에 만들었다. 아무래도 그때 설치했다고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표지석에 있는 기관명을 봐도 1995년 이전에 표지석이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명칭인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꾼 것이 1996년 3월1일이기 때문이다. 남궁병원은 그 이후인 1998년 문을 닫았다. 


1946년부터 사또 대신 청원군수가…
청주동헌의 용도유전, 이제는 관아공원이 바람직
1978년 군청신축 전 청사로 사용…위태로운 동거

표지석에 등장하는 청원군청은 내년 7월 통합시 출범과 함께 그 용도가 폐기된다. 청원군은 해방 후 미군정 당시인 1946년 6월1일 청주군 청주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청주와 분리됐다.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한 청주군의 청사는 청주동헌인 청녕각과 보조로 지어진 단층건물이었다.

<도정반세기·1996년 충청리뷰>의 저자 이승우 전 충북도 기획관리실장은 “해방 후 청주와 청원이 분리되면서 청주시는 현재 KT청주지사(옛 전화국 자리)에 있던 청주읍사무소를 시청사로 사용했다. 읍사무소는 규모가 컸기에 시청사로 손색이 없었다. 군청은 청주군이 썼던 동헌과 보조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군이라야 내무과와 산업과만 있던 시절이었다. 군수실과 행정계 정도가 동헌을 사용했고 나머지는 보조건물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청원군의 사료를 통해 청주동헌과 보조건물을 청사로 사용했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1962년에는 군수실이 있는 동헌 앞에서 자치 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양쪽 기둥에 걸린 세로 현수막에는 ‘국가재건은 농촌진흥으로’ ‘민주발전은 자치행정으로’라는 구호가 보인다. 구호의 내용에서 1961년 5·16 군사쿠데타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1978년 현재의 청사를 신축하기 전까지 청사로 사용하다 철거한 보조건물 사진에서도 근대사의 단면을 찾아볼 수 있다. 사진의 촬영연도는 분명치 않으나  지붕에는 ‘새마을운동’이, 현관 위에는 ‘총화유신’이라는 슬로건이 내걸렸다. 현관 위 현수막에는 ‘국민총화 이룩하여 적화야욕 분쇄하자’고 적혀있다. 유신과 새마을운동이 강조된 것으로 보아 1973년 전후의 모습으로 판단된다. 

▲ 청원군청은 청주동헌(사진1)과 보조건물(사진2)을 청사로 사용하다가 1978년 보조건물 자리에 현재의 청사(사진3)를 신축했다.

“명칭은 관아공원 바람직해”

청남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됐던 망선루와 마찬가지로 실용도의 건물로 사용됐던 청주동헌(충북도 유형문화재 109호)은 원형이 크게 훼손된 채로 남았다가 2008년 복원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1978년 보조건물을 허물고 현재의 청사를 짓는 과정에서 건물의 바닥면적을 확장하면서 청사와 동헌이 붙다시피 되어버렸다. 목조건물인 청주동헌은 청사의 그늘에 가려 건물의 노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청주청원 통합시의 탄생을 계기로 이같은 불편한 동거를 끝내야한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문제는 ‘청사를 허물 것인가’ 아니면 ‘동헌을 이전할 것인가’ 여부다. 강태재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상임고문은 “동헌은 조선 효종 때 건축돼 대대로 관아로 쓰였고 그 자리에 있었다. 건물이 크니 이를 철거할 경우 경제적 손실이 크다는 주장도 있지만 문화재를 철거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당연히 청사를 헐어내야한다”고 주장했다.

강태재 고문은 또 “청주의 역사성을 되찾고 나아가 청주의 옛 모습인 성안길의 과거를 되찾을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써 청주동헌과 그 일대를 역사공원화하는 방안이 거론돼야 한다. 명칭은 관아공원이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고 제안했다.

조선시대의 관청건물은 동헌을 비롯해 객관과 향사당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헌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 기록에 의하면 영조(1724∼1776) 때 근민헌이라 했으며 고종 5년(1868)에 이덕수가 다시 지으면서 청녕각으로 바꿨다. 기와에 순조 25년(1825)에 관청을 지었다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건물은 그때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당초 충북도의회가 거기에 있었다
1952년 중앙초 강당서 개원, 2년 반 동안 의사당 사용
2015년 학교 이전계획에 따라 의회청사 신축 검토 중

표지석에 등장하는 중앙국민학교가 중앙초등학교로 바뀐 것은 1996년 3월이다. 그러나 중앙초교도 이미 자리를 옮겼거나 폐업한 적십자 충북지사, 남궁병원 등과 함께 머지않아 표지석이 가리키는 그 화살표 끝에서 사라질 전망이다. 도심공동화로 학년당 2학급도 채우기 어려운 상황에서 2015년 율량2지구로 이전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 1952년 초대 충북도의회가 개원했던 옛 중앙초 강당은 2003년 철거됐다. 그러나 2015년 중앙초 이전과 함께 의회가 중앙초에 청사를 건립하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사진은 옛 강당의 모습.

재미있는 것은 충북도청에서 분가(分家)를 검토하고 있는 충북도의회가 이곳을 청사부지로 점찍었다는 것이다. 지난 3월 도의회에 따르면 의장단·상임위원장회의에서 중앙초등학교 부지를 매입해 청사를 신축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도의회는 주중동 밀레니엄타운에 있는 학생교육문화원 부지와 중앙초등학교 부지를 맞바꾸는 방안을 놓고 도교육청과 협의하고 있다. 학생교육문화원 건물은 교육청 소유지만 땅은 도가 출자한 충북개발공사 소유다. 중앙초가 충북도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같은 빅딜은 최상의 선택으로 보인다.

도의회는 지방자치제가 부활할 때 청사를 마련하지 못해 현재까지 도청 일부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충북도 역시 사무 공간이 부족해 도의회 이전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충북도의회 관계자는 “전국 시·도의회 가운데 충북만 독립 청사가 없고 중앙초교 강당에서 초대 도의회가 개원했던 역사성을 고려해도 이 학교 터가 도의회 신청사 부지로 적당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앙초, 일제강점기 잃어버린 역사

초대 도의회는 1952년 5월29일 오전 10시 중앙초 강당에서 개원했다. 이에 앞서 5월10일 도의원 선거가 실시돼 28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그렇다면 왜 초등학교 강당에서 도의회가 문을 연 것일까?

<도정반세기>의 저자 이승우 전 충북도 기획관리실장은 “1951년 5월26일 새벽 인민군 패잔병과 좌익분자들이 도청을 기습해 시설을 불태웠다. 이 때문에 개원할 장소를 도청 내에 마련하지 못했고 인근 중앙초교 강당을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전 실장은 또 “1955년 정낙훈 지사가 취임한 뒤 건물 재건축이 완료돼 2년6개월 만에 도의회가 충북도청에 자리를 잡게 됐다”고 덧붙였다. 어찌 됐든 도와 교육청이 빅딜이 성사된다면 도의회는 당초의 자리로 돌아오는 셈이다.

그러나 개원 당시의 강당은 2003년 5월 새 강당을 짓는 과정에서 철거돼 사진 속에서만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승우 전 실장은 “중앙초교 강당은 1915년 동정소학교 강당으로 지어졌는데 네덜란드 건축가 오란다가 설계한 아름다운 건물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고장 풀뿌리민주주의 산실이라 사료적 가치가 있음에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다”고 밝혔다.   

재미있는 것은 중앙초의 숨겨진 역사다. 중앙초 연혁은 개교시점을 1946년 해방직후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1909년 공립보통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 ‘일본인회 심상소학교’를 개교하고 12월15일 교사를 신축해 이전한 희가시마치(東町)가 중앙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박순복 중앙초 교장은 “어디를 찾아봐도 일제강점기 역사는 없다. 공식적으로도 1946년에 개교한 것으로 돼있고 졸업기수도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 아마 해방 전에는 한국인 졸업생이 단 1명도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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