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오성섭·신광성 등 보수정당에서 입지 찾아
유공단체 이끌며 ‘공공기관 임원자리’ 이어가기도

충북의 4·19 주역들은 격동의 현대사를 겪어오면서 대부분 소시민화 됐다. 4·19혁명과 관련해 도내에서 건국포장을 받은 사람은 모두 23명이다. 정계에 입문한 인물로는 김현수 전 청주시장과 오성섭 새누리당 중앙당 고문, 신광성 동명기술공단 부회장이 있다.

정치인으로서 성공의 길을 걸은 김현수 전 시장은 사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투사로 살았다. 충북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르는 동교동계로 정치를 한다는 것은 곧 투쟁의 길인 시대였다. 김 전 시장은 이같은 상황에서도 1978년 10대, 1985년 12대 총선에서 두 차례 금배지를 달았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는 아스팔트 위 투사로서 면모를 발휘했다

▲ 정계에 입문한 도내 4·19주역들은 야당에서 정치를 하기도 했으나 결국 보수정당에서 입지를 찾았다. 평생 공공기관 임원자리를 이어간 경우도 있다. 왼쪽부터 김현수 전 청주시장, 오성섭 새누리당 고문, 신광성 동명정보기술 부회장.

그러나 1992년 정주영 현대 회장이 만든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14대 총선(청원)에 나서면서 정치행로가 굴절됐다. 김 전 시장은 “87년 대선에서 망명 후 귀국한 DJ가 YS와 후보단일화를 하지 않는데 실망했다. 대선패배를 막기 위해 동교동을 찾아가 여러 차례 읍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대선에서 졌다”며 민주당과 등을 돌린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김 전 시장은 “당시 김 후보가 동교동을 찾아간 측근들에게 ‘대선후보가 한 사람이면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선거 닷새 전에 단일화하겠다’고 해서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선거에 임박해서는 대한민국지도를 펼쳐 보이며 ‘영남후보가 2명(노태우·김영삼)이어야 유리하다’는 논리로 단일화를 거부했다. 결정적으로 ‘이기든 지든 대선이 끝나면 합당한다’더니 ‘부정선거가 자행된 만큼 3등을 인정할 수 없다’며 말을 바꿨다”고 주장했다.

김 전 시장은 1995년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의 녹색바람을 타고 민선 청주시장에 당선된다. 김 전 시장은 “김종필 총재와는 노선이 맞지 않았다. 그러나 김해 김씨 항렬로 손자뻘인 김 총재가 간곡히 출마를 권유해 받아들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 전 시장은 ‘지금의 정치적 신념은 무엇이냐’고 묻자 “이제는 무소속이다. 지금의 야당은  정통성이 흐려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말살한 독재자지만 경제발전에 있어서 공로가 지대한 것은 사실이지 않냐”고 반문했다.

오성섭(4·19당시 청주공고 위원장) 새누리당 고문은 성균관대 학도호국단 위원장을 맡으며 1965년 6·3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생활은 공기업인 상공부 산하 디자인포장센터에서 시작됐다. 오 고문은 한국마사회, 한국관세사회 등에서 공기업 생활을 이어가는 와중에 1971년 9대 총선과 1985년 12대 총선에도 출마했다. 당시 당적은 민주통일당과 신한민주당 등 야당이었다. 오 고문이 여당 정치인으로 변모한 것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것이 계기다.

오 고문은 이후 공공기관 임원자리를 줄줄이 꿰찼다. “6·3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같이 감옥엘 갔다. 그 인연으로 서울시장을 할 때 지하철공사 이사, 도시철도공사 이사를 맡았고 대통령 할 때는 한국조폐공사 이사를 4년간 연임했다”고 밝혔다. 오 고문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중부4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8,19대 총선에도 같은 지역 예비후보로 등록했으나 공천은 받지 못했다.

오 고문의 정치행보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난 대선에서 4·19조직과 6·3조직의 박근혜 후보 지지를 이끌어내고 선대위 대외협력특보를 맡았던 것. 오 고문은 당초 안철수 지지를 선언하며 CS공동대표를 맡았다가 전향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광성(청주상고 위원장) 동명정보기술 부회장은 서울에서 삼문제지, 경도전자 등을 경영하며 사업가로 살았다. 1992년에는 지역출신 가운데 처음으로 4.19혁명공로자회 회장을 역임했다. 신 부회장이 정계에 입문한 계기다. 신 부회장은 “자민련이 탄생하면서 JP가 비서를 7번이나 보내왔다. YS로부터는 ‘공기업 발령을 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JP는 이에 대해 ‘신채호 선생의 후손이 정치를 해야되지 않겠냐’며 설득했고 그래서 자민련 흥덕갑 위원장을 맡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신 부회장은 출마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자민련이 수서비리로 구속됐다가 출소한 오용운 전 의원에게 옥중생활에 대한 답례차원에서 공천을 줬기 때문이다. 신 부회장은 대신 2000~2006년까지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 감사, 항만기술단 고문을 맡았다. DJP연합 정권 탄생에 대한 보상으로 자민련이 해양수산부장관 추천권 등 바다를 가졌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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