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현실이 잔혹한 ‘말죽거리 잔혹사’

노영원
현대HCN 충북방송 본부장

‘말죽거리 잔혹사’는 2004년 1월에 개봉한 한국 영화이지만 최근에도 케이블TV 영화 채널에서 끊임없이 재방영되고 있어 낯설지 않다. 제목만 보면 여인들의 슬픈 역사가 담긴 ‘잔혹사’ 같지만 여인들보다 훨씬 잔혹한 학창시절을 보낸 수많은 10대 청소년들의 현실을 무섭도록 잘 묘사한 영화다.

박정희 대통령의 철권통치가 최고조에 달했던 1978년 유신 말기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현수(권상우)’가 개발 붐이 불던 서울 강남의 한 고등학교로 전학 오는 장면을 시작으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지금은 양재역 사거리가 됐지만 말죽거리라는 강남스럽지 않은 이름부터가 왠지 지난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였다.

▲ 말죽거리 잔혹사 (2004) 한국 | 액션,드라마,로맨스/멜로 감독 : 유하 배우 : 권상우, 이정진, 한가인
그렇다. 이 영화에 나오는 고등학교의 모습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국의 영웅(?)’ 전두환이 청주를 방문할 때 선생들의 인솔 하에 거리에 나와 박수쳤던 고등학생 시절의 내 기억과 영화에 나오는 고등학교의 ‘유신 찬양’ 간판은 비슷한 것이었다.

순진한 현수가 학교의 주먹 서열 1위인 ‘우식(이정진)’과 어울리면서 일탈행위를 즐기고 꽃처럼 예쁜 ‘은주(한가인)’를 남모르게 짝사랑하는 내용까지는 영화 같은 꿈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식이 떠나고 은주에 대한 첫 사랑이 아픔으로 끝나면 이 영화는 현실로 돌아온다.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성적만을 강요하는 학교는 학생들을 통솔하기 위해 무자비한 ‘군사문화’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교련 선생으로 상징되는 학교 군사문화의 폭력과 부모의 지위에 따른 선생들의 불평등한 대우 등은 이 영화를 빼고 다른 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폭력에서 항상 약자였던 나의 서글픈 모습은 학교 선도부장인 ‘차종훈(이종혁)’을 응징하는 현수의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꼈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는 현수의 모습에서 나의 10대 모습이 오버랩된 것이다.

현수 아버지가 성적이 떨어진 아들에게 “대학 안 나오면 잉여인간이야”라고 나무라는 장면 역시 어쩌면 그렇게 현실과 똑같은지 요즘에도 부모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말이 아닌가?

유난히 힘든 고교 시절을 보낸 나에게 현수가 학교 유리창을 부수면서 내뱉은 “대한민국 학교 ○까라 그래”라는 이 영화의 대사는 내 고교 시절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배경음악으로 등장하는 ‘필링’ 등 주옥같은 팝송과 홍콩 가수 진추하의 노래 등 그 힘든 사춘기에도 한 줄기 단비 같았던 음악들을 영화에서 다시 들으면서 ‘크느라 너무 아팠던’ 시절은 마냥 어두운 시간만은 아니었다는 위안을 받기도 했다.

이 영화를 처음으로 봤을 때 진추하의 ‘Graduation tears’가 흘러나오자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린 것은 그래도 그 시절로 한 번만 돌아가고 싶은 회한을 느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권위 앞에서 ‘충성’하는 평범한 시민이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지만 어쩔 수 없이 권위에 무릎 끓고 그 권위의 따스함을 즐기고 싶은 40대 중년의 내 모습을 새삼 자각한 것이다.

‘잉여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채 밤 11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아들이 케이블TV에서 말죽거리 잔혹사를 함께 보다가 “아빠 학교 다닐 때 진짜 저랬어?”라고 묻는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들에게 묻는다. “지금 네가 학교를 다니는 이 시대는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니?”라고.

그렇다. ‘내게도 저런 때가 있었지’라는 생각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의 아이들도 세상이 거대한 폭력이었음을 회고하는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의 질문 속에서 영화 속 배경인 1978년에서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학교 폭력과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직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현실이 다시 한 번 갑갑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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