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속리산기’ ‘속리산우기’ 등 2편의 속리산유기 집필

유홍준 교수 “어당 ‘동행산수기’는 19세기 인문정신 대표”
추양정사·추양재사 통해 어당과 여섯 제자의 학문 기려

산은 다가가서 골체(骨體)보고 떨어져서 신리(神理) 보아야
김용남 충북대학교 강사

본 글은 충북학연구소의 연구저널 간행물 ‘충북학’ 제14집에 실린 ‘어당 이상수’의 인물기를 부분 전재한 것이다. 허락해 주신 충북학연구소와 김용남님께 감사드린다.

어당 이상수(李象秀 1820~1882)는 19세기 시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문사이며 성리학이나 경전의 가르침에 심취한 성실한 교육자이다. 특히 그의 문인으로서의 존재는 금강산유기인「東行山水記」에 연유하는바, 김주미가 ‘조선후기 산수유기의 전개와 특징’(1994)에서 이 작품을 김창협(金昌協)의「東遊記」·박종(朴琮)의「白頭山遊錄」과 함께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처음 언급하면서 연구를 시작하였고, 유홍준은『나의 북한문화유산 답사기 2 -금강예찬』(1998)에서 뛰어난 묘사력으로 철학적 사색과 명상의 깊이를 보이는「동행산수기」야말로 19세기 인문정신을 대표한다고 하였다.

▲ 속리산 전경

이어 김채식이 ‘어당 이상수의 산수론과「東行山水記」분석’(2001)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며, 이 작품은 이상수를 ‘조선후기를 대표할만한 산수유기(山水遊記) 작가’라는 절대부동의 평가를 낳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필자는 최근 몇 년 동안 관심을 기울였던 속리산유기 연구의 일환으로 이상수의 「遊俗離山記」와「俗離會遇記」를 주목하여「이상수의 속리산유기에 드러나는 의론(議論)의 강화와 그 특징」(2009)을 발표한 바 있다.

선행 연구자들이 극찬했던「동행산수기」의 뛰어난 묘사력, 철학적 사색과 명상의 깊이는 그의 속리산유기에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아니 어쩌면 속리산유기에서 의론의 강화를 통해 더욱 확연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글은 조선후기 산수유기 작가로서의 이상수의 성가(聲價)를 속리산유기를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31세에 파주에서 보은 회인으로 이주

▲ 추양재사(이상수와 여섯 제자의 영정을 봉안)
이상수는 자가 여인(汝人) 호는 어당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로 조선 정종(定宗)의 열 번째 왕자인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후손이다. 어당의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파주(坡州)에 세거한 노론 가문이며, 그의 아버지는 회인 고을 내 이름 높던 아홉 선비인 ‘죽계구로(竹溪九老)’ 중 한 사람인 연주(演周 1791~1867)이다.

이상수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허약하였으나 매우 총명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선친에게 때때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12살이 되어서는 이미 칠서(七書)를 독파하였으며 율시작법(律詩作法)에 익숙할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과 타고난 문학적 재능으로 과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평생 독서하는 선비로 살아갔다.

그는 31세에 가족을 이끌고 파주에서 보은 회인의 추동(楸洞)으로 옮겨 50세까지 20년 간 그곳에 살면서 강학활동을 하여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 1846~1918)를 비롯한 많은 제자를 길러내 회인현에 유풍(儒風)을 진작시켜 그곳을 학향(學鄕)으로 만들었다. 그 후 51세에 청주의 연제(蓮堤)로 거처를 옮겨 이곳에서도 학동을 모아 교육을 하며 회인의 제자들을 함께 돌보는 생활을 하였다.

이상수는 회인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산수를 찾아 나선다. 그가 지은 첫 번째 산수유기인「遊俗離山記」를 비롯하여「山行小記」,「東行山水記」가 30대에 지은 것이며,「俗離會遇記」가 43세,「遊烏棲山記」가 50세, 가장 늦은 56세에 지은 것이「東峽山水記」이고 보면, 회인에 머무는 31세에서 50세까지 20년 동안 산수유기를 집중 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 영월, 단양 등 전국에 발길닿아

이상수는 회인에 머물면서부터 산수를 가까이 하였다. 파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보은의 회인으로 이사한 후 궁핍하고 낙척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그는, 심사가 울적할 때면 집 근처로 나가 작은 시내나 거친 돌을 가지고 무료함을 달래며 산수를 대하여 상상의 나래를 폈다. 무료함을 달래주고, 동시에 산수를 상대로 한 무한한 상상력의 발휘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요 위안인 점을 생각할 때, 그에게 있어 산수는 한 마디로 가장 ‘좋은 벗’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이상수는 산수를 매우 좋아하였다. 박문호는 어당이 “산수(山水) 붕우(朋友) 문장(文章)은 서로 신리(神理)가 유통하는 존재이며 이것이 학문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면서 직접 전 국토의 반을 돌아보았다.”고 하였는데, 실제 이상수는 속리산, 망월산, 금강산, 화양동, 영월, 단양 등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한편 산수에 대한 남다른 생각도 엿보인다. 그는 「동행산수기」의 서두에서, 산수는 신묘한 존재라는 것과 사람이 신리(神理)로 이해했을 때 비로소 그 풍채를 발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산을 온전히 보고자 한다면, 다가가서 그 골체(骨體)를 보고 떨어져서 그 신리(神理)를 보아야 한다.”고 하여, 산은 정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제일이고, 멀리 보아야 그 풍신(風神)을 바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명산(名山)은 명사(名士)와 같아서 절로 그 품격이 있으니 구설(口舌)로 가감(加減)할 바가 아니다.”고도 하였다. 명산을 명사와 동일시하여 보통 사람들이 함부로 칭찬하거나 헐뜯을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산수를 바라보는 안목이 높아야 한다는 것이고, 보통 사람들이 섣불리 평가하는 것 또한 경계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속리산유기 총 13편 중 2편 남겨

필자가 조사한 바로 속리산유기는 현재 12명의 작가 13편의 작품이 전한다. 속리산유기 작가 중 유일하게 2편을 남긴 이가 바로 이상수이다. 그가 속리산을 찾게 된 때는 1850년 그의 나이 31세 때이다. 이때 어당의 부친이 대대로 세거한 파주를 떠나 나이 60에 가족을 이끌고 충북 보은의 회인현 남면 추곡리(楸谷里)로 이사를 와 살게 되자 그가 부친을 모시고 온 것이다.

이상수가 회인에 정착하자 그의 친구가 그가 사는 회인 집에 찾아와, 이때 속리산을 처음 유람하고「遊俗離山記」를 남겼고, 이로부터 12년 후인 1862년 43세에 또 다시 속리산을 찾고「俗離會遇記」를 남겼다. 이제 두 편의 속리산유기를 통해 그의 철학과 사색의 깊이에 다가가 보자.

1) 삶의 태도에 대한 반성의 촉구:유속리산기(遊俗離山記)

▲ 유속리산기(遊俗離山記)
‘유속리산기’는 감산(甘山: 李黃中 1803~ 1862)이라는 친구의 방문에 매우 감격하는 모습부터 보여준다. 파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보은의 회인으로 이사한 후 궁핍하고 낙척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에게 지기(知己)의 방문은 추운 겨울날 한 줄기 햇살처럼 참으로 고맙고 반가운 일이었을 것이다. 헤진 베옷을 걷고 바람과 서리를 맞으며 족제비와 다람쥐가 다니는 깊은 산길로 자신의 산거(山居)를 찾아준 친구이기에 더욱 고마운 것이리라.

산은 지기(知己)와 함께 찾는 회심처(會心處)라 했던가. 이상수가 친구와 속리산에 가서 본 것은, 9월 8일 법주사를 거쳐 순종대왕 태실과 복천암, 9월 9일 수정봉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의 유기에는 이러한 견문 사실을 마치 노선만 긋든 간단히 얘기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코스인 수정봉을 보고 내려와서는 속리산이 서울을 중심으로 보면 동서의 이백(二伯) 중의 하나에 해당한다고 평한다. 그리고 그 끝에 “내가 본 것은 거의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고하였다. 사실 눈으로 보는 것이 다는 아니다. 마음으로 봐야 하는 것이고, 속리산의 산세를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있는 안목이 또한 중요한 것이다. 다음은 이 작품의 끝 부분이다.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꿈은 아닌가? 속리산은 진실로 내 의중에 있는 산이었으나 오늘 갑자기 이곳에 이르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감산이 친구를 위하여 천리를 수레를 타고 올 줄은. 사람이 세상에 처함에 있어 일은 변하고 항상 뜻밖의 것이 있는 것이며, 생각이라는 것은 늘 눈앞에서 그쳐 한번 그 때를 잃어버리면 마치 흔들리는 바람과 흐르는 물을 가히 쫓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오히려 고집하고 변치 않으면서 자기주장만 믿고 오래가는 것이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노선은 간단기술, 마음속 의론 담아

이상수는 산천을 유람한 후에는 ‘약(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애초 유산기를 작성할 때도 자신이 견문한 사실을 죽 나열하는 식은 맞지 않았을 것이다. 견문한 사실을 나열하고 만다는 것은 마치 책방에 널려있는 책과 같아 그저 외물(外物)일뿐 체화되어 내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의론은 바로 유람한 후에 ‘약(約)’을 하는 과정 혹은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수는 1차 속리산 유람을 통해 무엇을 ‘약(約)’ 하였는가? 우선 위 인용문 앞부분은, 평소 의중에 있던 산이었지만 생각만 할뿐 가볼 기회가 없었다가 마침 친구의 방문으로 속리산을 보게 되었기에, 이 속리산행을 통해 늘 생각만 하고 결행하지 못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자는 뜻을 펼친 의론(議論)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이라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그리 쉽지 만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지 작정해보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늘 변화무쌍하고 뜻밖의 일이 벌어질 때가 있기 때문에 평소 품어왔던 생각도 여의치 않은 상황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러함을 알기에 친구나 산수를 대할 때도 생각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직접 몸을 움직여 한 번 찾아볼 것, 곧 생각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결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1차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진 것이다.

한편 한번 잃은 기회는 마치 빠르게 지나가는 회오리바람이나 쉬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다시 잡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하였다. 인생이라는 것은 한번 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회적인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으며 한세상 살아가는 데 있어 유연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고집하고 변하지 않으면서 자기주장만 믿고 오래가는 것이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인간관계와 일의 처리에 있어 조화와 변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우리에게 던진 2차 메시지일 것이다.

이상 이상수는「유속리산기」에서 평소 우리들의 삶의 태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으며, 그것을 의론(議論)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때 의론은 유람 중에 만난 어느 한 경물로 촉발된 것이 아니라 유람을 마치고 난 후 총괄하여 제시하는 형식이다. 이렇듯 이상수의 속리산유기는 실제 유산 때보다도 유산 뒤에 남는 감동과 그 의미의 확대를 더욱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 인생의 이치 깨달음의 촉구:속리회우기(俗離會遇記)

▲ 속리회우기(俗離會遇記)
「속리회우기」는 이상수의 나이 43세인 1862년 가을에 속리산에서 친구들과 만나 그 감회를 적은 것이다. 윤은로(尹殷老) 서여심(徐汝心) 임군원(任君元)이 서울에서 이곳 속리산에서 가까운 화양동에 들어와 그에게 편지를 보내 속리산 법주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윤은로는 이상수와 함께 파주에서 살면서 시문을 주고받았던 단번(檀樊) 윤치조(尹致祖 1819~1877)이고, 서여심은 그가 평소 외우(畏友)로 섬기며 우정이 각별하였던 서응순(徐應淳 1824~1880)이며, 임군원은 이상수가 사림의 숙덕(宿德)으로 존경하며 몇 차례 방문하여 학문을 토론하였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 1876)이다.

이상수가 위 세 사람과 함께 속리산을 다시 찾은 것은 1862년 9월 17일이다. 꼭 12년 전 9월에 이상수는 이황중(李黃中)과 함께 속리산을 둘러보고 그 감격을 토로한 바 있는데, 서두부터 그 얘기를 쓰고 있다. “지난 경술년 9월에 감산(甘山)과 더불어 이곳에서 노닐던 일이 어느덧 12년이 넘었다. 내 머리는 희어졌고, 감산은 고인이 되었다.”고 말이다.

서로 시를 수창하며 속리산을 함께 올랐던 감산을 마침 그 해에 보내고 친구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먼저 간 친구와 12년 전에 함께 했던 속리산 법주사에 이르니 더욱 친구에 대한 정이 사무친 것이다.

거칠고 궁벽한 어당의 가세도 소개돼

이상수 일행은 복천암을 지나 상고암에 올랐다가 다시 상환암에 내려와 잤다. 이때 청산(靑山)에 있는 후경(厚卿: 李重夏 1846∼1917)의 집에 가보자는 윤치조의 제안으로 이중하의 집에 방문하였다가 다시 동쪽으로 십리를 가 임헌회의 집에 가서 잠시 머물고, 다시 이중하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 자리에서 윤은로가 어당의 집을 방문하고자 하는 뜻을 비쳤는데, 서응순은 장차 영남으로 가고자 하여 이별하고, 윤은로와 함께 그의 회인 집으로 간다. 청산에 있는 후경의 집에서 회인 이상수의 집으로 오기까지는 매우 험한 여정이었다. 힘겹게 찾은 회인 이상수의 집, 그 거칠고 춥고 궁벽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현미밥에 박주(薄酒)를 내었는데 능히 마실 수 없었고, 잠자리는 토방의 헤진 자리였다. 이상수는 다소 길게 의론을 편다.

『옛날 내가 殷老와 같은 군에서 서로 어울리다가 내가 남쪽으로 건너오니 은로가 얼마 되지 않아 또한 떠나 서울에서 살았고, 얼마 있다가 厚卿이 또한 남쪽으로 내려오고 君元이 이었으며, 汝心이 최근 다시 서울에 우거하니 마치 부평초가 떠다니고 구름이 흩어지듯 뿔뿔이 나뉘어 서로 합하지 못하였다.

지금 모인 것은 생각하여 미친 바가 아니고, 친구 중 죽은 자도 몇 사람이다. 바야흐로 술은 한창이고 등불은 다 타들어 가는데 서로 바라보며 매우 기뻐하다가도 離合存沒의 느낌이 별안간 가끔씩 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일찍이 氣化가 심히 빨리 가고 人事가 바뀌는 무상함을 탄식하였고, 만나는 곳이 따라서 자주 변하니, 無常한 인간으로 심히 빠른 세월을 맞이하고 자주 변하는 환경을 겪으면 의당 그 기뻐하고 슬퍼함이 끝없이 서로 찾아오는 것을 능히 그만둘 수 없음이라. 부처님이 이른바 ‘몽환포영’이라는 것도 이 이치 아님이 없다. 그런 까닭에 옛날 달인들은 이에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 법주사 경내.

이미 제군들은 헤어져 떠났고, 또 부평초가 떠다니고 구름이 흩어지듯 뿔뿔이 나뉘어 서로 합하지 못할 것이니 어젯밤을 좇으려 하나 모두 이미 표홀히 변하여 없고 묵은 자취가 되어버리니 더욱 개탄스럽다. 그러나 천지 안에 가득한 것은 모두 다 변하고 파괴되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데로 돌아가니, 애당초 이것을 믿어서 견고한 것으로 삼을 수가 없고, 다만 여기에 함께 변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니 우리들이 서로 기대할 것은 이것뿐이다. 하물며 나는 도망하여 암혈에 숨어 살며 땔나무하고 소치는 사람들과 여러 마리의 원숭이 새와 섞여 살면서 육체와 정신이 초췌하고 의기가 쓸쓸하니 말에 묵묵한데 들어 줄 자 누구인가? 』

작품의 끝부분으로 온통 작가의 의론으로 채워져 있다. 두 편의 속리산유기에 드러나 있는 어당의 속리산 유람의 동기는 친구의 방문이나 친구와의 약속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유기에는 친구의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산행의 의미도 친구로 인해 더욱 각별하게 부여된다.

물론 31세에 감산이 찾아와 속리산에 갔을 때와 감산과 윤사정 이인석이 죽고 난 후 43세에 윤치조 서응순 임헌회와 속리산을 찾았을 때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그러나 친구로 인해 산수를 찾게 된 감회에 유달리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모습은 같다. 그렇기에 의론을 더욱 감회와 긴밀히 얽어서 문장을 써내려가는 것이 이상수 속리산유기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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