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면의 석주 불비상…동시대 조치원 근교에서 제작 추정
국립청주박물관 4월22일부터 7점 모아서 ‘특별전’ 추진

국립청주박물관 불비상 특별전
불비상(佛碑像)이라는 용어는 불교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에게는 귀에 설은 단어다. 포털사이트 지식백과에 물어봐도 ‘직육면체의 형태로 전후좌우의 4면에 불상을 조각한 비석’이라는 간단한 설명이 전부다. 그러나 청주사람들은 불비상에 대해 알아야한다. 억지주장 같지만 국립청주박물관이 소장한 2300여점의 유물 가운데 국보 1점, 보물 2점이 불비상이다. 국립청주박물관에서 불비상을 제외한 보물은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 1167호)뿐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문화재급 불비상은 모두 7점이다. 7점 가운데 2점은 국보로 지정됐고 나머지 5점은 모두 보물이다. 확증할 수는 없지만 학계는 이 7점이 한 사람에 의해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제작연대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고 조각기법도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불비상의 연고가 현재의 세종시, 옛 충남 연기군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사람의 장인이 만든 불비상 가운데 7점이 현존하고 있으며 이들 작품이 모두 보물급 이상 문화재라면 그 장인의 솜씨는 가히 신기(神技)라 할만하다. 

▲ 현존하는 삼국시대 불비상 7점은 모두 국보 또는 보물이다. 이 중 3점은 국립청주박물관에 있다. 그런데 이 7점은 모두 동일인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국립청주박물관이 7점을 한자리에 모으는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 왼쪽부터 국립청주박물관이 소장한 계유명, 기축명, 미륵보살반가석상, 맨 오른쪽은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계유명 불비상.

국립청주박물관(관장 윤성용)이 야심찬 기획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청주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3점에 나머지 4점을 더해 ‘돌에서 부처를 만나다, 한국의 불비상’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을 열기로 한 것이다.

전시예정인 불비상은 국립청주박물관이 소장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국보 106호),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보물 367호), 미륵보살반가석상(보물 368호)를 비롯해 국립공주박물관에 있는 계유명삼존천불비상(국보 108호), 세종시 연화사에 있는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보물 649호), 칠존불비상(보물 650호) 등 2점, 동국대박물관이 소장 중인 삼존불비상(보물 742호) 등이다.

주최측인 국립청주박물관은 4월22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6월23일까지 2달여에 걸쳐 박물관 내 청명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행사를 갖고 도록 발간, 특별강연도 진행할 계획이다. 3월5일 현재 자체 소장한 3점 외에도 공주와 동국대 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대여가 결정됐으며 연화사에 봉안된 2점에 대해서는 섭외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성용 국립청주박물관장은 “불비상에 있는 명문과 보존상태, 기법 등을 고려할 때 제작연도가 명시된 작품이나 그렇지 않은 작품 모두 7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백제가 패망해 신라에 흡수되는 시점이었다. 불비상의 명문에는 내말(乃末) 등 신라의 벼슬이름과 달솔(達率) 등 백제의 벼슬이름이 같이 등장한다. 이는 백제 사람들을 끌어들여 신라의 벼슬을 주고 백제의 벼슬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정치상황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윤 관장은 또 “중국의 불상기법은 백제를 통해 한반도에 전해졌다. 또 이는 통일신라로 전파돼 불상양식의 모태가 됐다. 현존하는 불비상이 연기지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연구가치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불비상의 출처가 모두 조치원 근방이라는 것은 7점이 모두 동일인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높여준다. 먼저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 중인 3점은 모두 세종시(구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에 있는 고찰 비암사에서 1960년에 학술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1973년 황수영 박사 연구 주목할만

이에 대한 근거는 역사학자 황수영(2011년 작고) 박사가 1973년에 펴낸 <한국불상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황 박사는 1960년 동국대 불교대학에 재학 중이던 이재옥으로부터 “자신의 고향인 연기군 비암사 3층 석탑에 무엇인가 새겨진 흑색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답사에 나선다. 당시 황 박사가 부락의 촌로나 사찰 주지로부터 들은 말은 일찍이 사역에 방치돼 밭둑에 굴러다니던 것을 석탑을 재건할 때 탑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굴러다니던 이 돌들은 그 해 모두 국보로 지정됐다가 새로운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되면서 국보와 보물로 분리됐다. 이 3점은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가 1987년 개관한 국립청주박물관으로 이관됐다.  
황 박사의 책에서 나머지 4점의 불비상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의 것은 1961년 7월에 조사가 이뤄졌다. 석상이 발견된 서광암은 조치원에서 서울로 가는 1번국도에 접한 속칭 내창이 부락에 있는 초가(草家)법당이었다. 황 박사가 사찰관계자들로부터 들은 얘기는 “1951년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받은 하수도의 덮개로 쓰던 것을 여신도 3명이 갹출해 운반해왔다”는 것이었다. 국보로 지정된 이 불비상은 1962년 공주박물관에 이관됨으로써 국고에 귀속됐다.

동국대박물관의 것은 유일하게 구(舊) 연기군이 아닌 공주시 정안면 동막동에서 발견됐다. 소장처도 사찰이 아닌 고 모씨의 집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전쟁 직후에 소유권의 변경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불비상은 1966년 5월 동국대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세종시 연서면 월하리 연화사에 있는 2점 역시 비슷한 시기인 1961년 6월에 조사됐다. 연화사는 1914년에 창건된 사설법당으로, 폐사지에 지어진 절도 아니다. 황 박사의 책은 당시 사찰 소유자 조 모씨가 “인근 쌍류리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생천사지에서 현몽에 의해 발견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발견장소와 비암사는 불과 2km 거리에 있다.

윤성용 관장은 “7점을 학술적으로 최초 확인한 황수영 박사가 당시 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했는데 발견지점이 충남 연기군 일원에 몰려있다는 점은 유사한 조각기법과 함께 동일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리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불비상이 제작된 시기도 모두 7세기 후반으로 확인됐거나 추정된다. 7점 중 명문에 제작연도가 새겨진 것은 모두 4점이다. 이 가운데 계유(癸酉)가 새겨진 청주와 공주박물관의 국보는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만들어진 것이다. 무인(戊寅)명 연화사의 보물 1점은 계유년으로부터 불과 5년 뒤인 문무왕 18년, 즉 678년에 제작됐다. 끝으로 기축(己丑)이 새겨진 청주박물관의 보물 1점은 신라 신문왕 9년, 즉 689년 작품이다. 윤 관장은 “나머지 작품들도 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백제 패망이 660년인 것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은 윤 관장의 말 대로 신라가 패망한 백제를 정치적으로 흡수하는 과정이자 문화적 영향을 주고받던 시점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활약한 백제출신의 위대한 석공 아무개…. 범인(凡人)의 눈으로도 그 솜씨가 한 사람의 것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을까? 특별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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