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8일 ‘운보의 집’에는 방문객조차 없어

친일행적과 청각장애에도 불구하고 한국화단의 거목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운보 김기창 화백 탄신 100주년을 맞았으나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전혀 기획되지 않아 살아서 찬란했던 그의 명성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1~2월은 김기창 화백의 탄생과 작고 등 그를 추념할만한 기념일이 몰려있는 기간이다. 특히 2013년 2월18일은 그가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또 지난 1월23일은 작고 1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913년 서울에서 태어난 운보 김기창 화백은 8살 때 장티푸스를 앓아 청각을 잃었으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의 소개로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한국화를 배워 1931년 조선미술대전에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입선 6회, 특선 3회를 기록했다.

▲ 올해는 운보 김기창 화백 탄생 100주년이다. 그러나 운보의 집 파행 등으로 100주년이 되는 2월18일에는 어떤 행사도 열리지 않았다. 사진은 운보 작고 12주년인 지난 1월23일 그의 묘소를 찾은 제자들과 사회복지법인 관계자들.

김 화백은 일제말기 ‘총후병사’ ‘적진육박’ 등 일본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작품을 그린 것으로 드러나 친일화가라는 낙인이 찍혔으나 천부적인 재능과 독창적인 화풍으로 ‘청록산수’ ‘바보산수’ 등 한국화의 독보적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1984년 운보의 집을 짓고 2001년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는 모친의 고향이다. 8만3000m²의 대지에 운보의 집을 비롯해 운보미술관, 수석공원, 조각공원, 도자기공방, 연못과 정원, 찻집 등이 있었다. 또 운보미술관에는 대표작과 도자기, 판화, 스케치, 유품, 부인 박래현의 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청원군 “운보 100주년 몰랐다”

문제는 이들 시설이 모두 폐쇄되다시피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운보의 집 파행은 운보 사후인 2001년 3월 출범한 재단이사회 파행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사회는 운보 아들인 김완씨와 (주)운보와 사람들에서 3명씩 추천해서 이뤄졌다. 앞서 김씨는 무역업에 손댔다가 빚을 지자 운보의 집 대지 일부를 모 파이낸스에 팔았다. 이 업체는 후에 영리법인인 (주)운보와 사람들이라는 법인을 만들었으나 얼마 안가 파산하고 만다. 하지만 (주)운보와 사람들이 운보문화재단보다 1년 앞서 만들어지면서 이 곳에서 이사회 구성에 관여했던 것.

이렇게 되면서 이사회에는 저명한 문화예술인이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가지 않았고, 충북사람도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이 때 첫 단추를 잘못 꿰면서 현재까지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한 문화관광부가 충북도에 재단을 인수하도록 권고했으나 진행되지 않았고 청원군도 미온적인 입장을 취했다. 결국 문광부가 나서서 이사회를 해체했지만 전직 이사들에게 새 이사를 추천하도록 해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후원회장을 자칭하며 300억원을 투자하겠다던 황인연씨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이사회 구성에 관여해 사실상 회복불능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지난 1월23일 작고 12주년을 맞아 운보의 집을 찾았던 청음회관, 운보원, 청음공방 관계자 등 50여명은 홍병학 운보미술관장이 문을 열어줘 미술관 내부를 둘러보며 추모의 뜻을 기린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A씨는 “당일 현장을 찾았던 사람들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생전에 설립했던 복지법인 관계자들과 재자들이다. 운보의 집이 파행을 겪고 있지만 해마다 기일에 내려와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재단 이사들은 물론이고 아들의 친구라고 생색을 냈던 지역인사도 눈에 띄지 않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100주년이 되는 2월18일에는 운보의 집은 물론 전국 어디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지 않았다. 청원군 문화체육과 관계자는 “업무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운보 탄생 100주년이라는 것을 몰랐다. 알았더라면 뭔가 행사를 기획했을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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