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무게에 밀려 정북토성에 온 김성호·이성준 명장

정북토성이 있는 마을 정북동에는 2명의 대한민국 명장이 살고 있다. 경기도와 서울일원에서 작업했던 그들이 정북토성을 찾은 데는 청주시가 국제공예비엔날레가 개최되는 도시인데다, 땅값이 싸다는 이유가 마음을 움직였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 그들이 몸을 누운 곳은 작은 농가였다. 옻칠분야 명장 김성호(57)씨와 소목장 이성준(69)씨를 지난 15일 작업장에서 만났다. /편집자

▲ 명인공방 앞에서 김성호 명장(왼쪽)과 이성준 명장이 활짝 웃었다. 나이로는 형님과 동생사이지만 명장으로서 서로를 존경한다. 사진/육성준 기자

“옻칠은 영원으로 가는 작업이다”
옻칠 분야 김성호 명장

김성호씨가 먼저 정북동에 터를 잡았다. 6년 전 세월의 무게에 쫓겨 찾은 곳이 청주였다. 통영 출신인 그는 나전칠기 및 옻칠분야의 대한민국 명장이다. 40년 넘게 옻칠을 해왔지만 아파트 문화가 도입되면서 사양길을 걷고 있다. 천직으로 알고 버텨왔지만 지금은 힘에 많이 부친다. 통영에서 외가는 대대로 칠기업에 종사했다. 그런 그가 작가로서 길을 걷게 된 것은 당시 동대문에 있던 새로나 백화점에서 늘가 이성운 선생의 작품 전시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부터다. “군대 갔다 오고 옻칠을 계속해야 하나 회의감이 들었을 때 작품 전시를 보고 신천지를 만난 기분이었어요. 그 길로 문하생이 됐죠.”

옻칠 김성호 명장. /사진 육성준 기자
이후 동아공예대전 입선을 시작으로 그 분야에서 각종 상을 탔다. 그 중에서도 전승공예문화재청장상, 옻칠공예대전 국무총리상 대상을 받았다. 70~80개의 상을 탔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2008년 대한민국 명장이 됐다. 대한민국 명장제도는 고용노동부가 운영하고 있는데 1년에 한 번씩 분야별 심사가 열린다. 89개 직종 500여명 남짓의 명장이 있다. 국가가 지정하지만 큰 혜택이 있지 않다. 연말에 ‘계속종사장려금’이라고 해서 딱 한번 몇백만원의 지원금을 주는 게 전부다. 그러다보니 대한민국 명장들의 삶은 빈궁하다. 따로 직원을 둘 형편도 안 된다. 김씨는 “명장들이 태어나는 아이만도 대우가 못해요”라고 씁쓸한 농담을 건넸다.

그가 청주에 매력을 느낀 것은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때문이었다. 또한 단양 천태종 구인사의 대로사전의 옻칠작업을 하게 되면서 충북과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대목장 신응수 씨(남대문 복원 총 책임자)등 전국의 장인들의 총출동했다.

지난해 10월에는 한국공예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옻칠은 기물을 보존하는 데 쓰는 기법으로 한·중·일에서 발전됐다. 온도 25도와 습도 75도에서 건조되는데 습을 잡아주는 유일한 천연재료다. 나무에 옻을 입히면 천년이상 보존된다. 방습, 방충, 방향의 효과가 있다.

소목장이 만든 작업에 옻칠과 나전칠기를 붙여 화려한 작품으로 탄생된다. 이제 인근에 살고 있는 이성준 명장의 작품을 재료로 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칠기 작업은 보통 40가지 공정을 거쳐야 하고, 제작기간도 6개월 남짓이다. 천만원대의 고가 작품이지만 세월과 노력을 생각해보면 비싸다고 잘라 말할 수 없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가는 작업, 그것이 바로 옻칠 작업이고 명장의 인생이다.

“내일이면 70인데, 아직도 하고 싶은 데 많아”
소목장 이성준 명장

이성준 명장과 김성호 명장은 수십 년 째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쌓았다. 각종 대회에서 수상경력을 쌓으면서 명장의 위치에 서기까지 늘 만나왔기 때문이다. 수상자로 만났던 이들은 이제 심사위원이 됐다. 이성준 명장은 소목장이다. 55년 동안 나무를 매만진 그는 아직도 나무를 갖고 하고 싶은 게 많다.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소목장 이성준 명장. /사진 육성준 기자
돈을 벌려면 건축일이 한창 잘 나갈 때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는 나무로 뚝딱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좋았다. 특허출현도 여러 건 해놓았지만 특허는 대량생산에 맞춰져 있어서 돈으로 환산되지는 않았다. 가령 가구의 다리 부분을 서랍식으로 열 수 있도록 고안하거나 휘는 기법 등 그만의 아이디어가 작품에 녹아있다.

뿐만 아니라 창호 기술도 갖고 있다. 소목장이지만 대목장, 창호기술까지 있어 지인들의 한옥을 몇 채 지어주기도 했다. 1995년 대한민국 명장 제143호가 됐다.

그는 김성호 명장의 권유로 이곳에 왔다. 고향은 충주 신의면. 아직도 친척들이 그곳에 터를 잡고 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1962년 서울로 상경에 작업활동을 펼치다가 살림이 어려워지면서 경기도 일원으로 떠났다. 의정부에 있다가 지난해 11월 청주 정북동 한 농가를 임대해 터를 잡았다.

2011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때에는 조달청 문화상품협회 등록작가라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원목에 전통기법으로 작업하는 그는 명인공방을 60년대부터 운영했다. 한때 역대 대통령들의 표창도 받았고, 장관상도 여러 번 받았다. 전승공예대전 금상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지만 나무를 사지 못해 카드빚을 낸 것이 화근이 돼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됐다. “우리문화와 전통보다는 사람들이 싼 것만 찾으니까 작가의 작품은 자꾸만 쌓이네요.”

재주만큼 돈이 쌓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IMF를 겪으면서 제자들을 내보내고 지금은 혼자 작업하고 있다. “손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싶어요. 기계에 의존하는 건 나중에….”

그는 과거 명절에는 윷놀이판이 잘 나갔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못하다고 했다. 바둑판도 잘 안산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요즘엔 인터넷으로 바둑을 한다고 했다.

오는 4월이면 서울코엑스에서 열리는 조달청이 주최하는 전시에 참여한다. “그래도 우리는 정년이 없으니까 이렇게 불경기일수록 더욱 노력해야해요. 내가 움직여야 사람들도 내 작품을 찾으러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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