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세평_ 이상종 청주복지재단

즐겨보는 아프리카 동물의 세계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간혹 답답한 장면이 있다. 사자가 물소를 사냥하는데 덩치가 큰 물소 떼도 조직적으로 단합하면 사자를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음에도 흩어져 도망만 다니다가 결국 약한 물소가 희생된다. 생존을 위해 어리고 병든 약한 물소만을 골라내는 포획자의 전략에 감탄하기 보다는 물소 무리가 유기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그냥 안타깝고 답답하다.

다행히 사람 사는 인간계에는 약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는 사회적 시스템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과 새삼 문명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사회적 시스템뿐만 아니라 사람도 각 신체 부위가 상호간 또는 전체의 영향을 미치는 유기체이다. 저 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역할을 한다. 얼굴은 평판과 호감을 좌우하는데 많은 영향이 있고 밖으로 보이는 역할을 한다.

한편 머리가 생각하거나 마음 대로 잘 되지 않는 것도 있다. 니코틴에 마미 되면 담배 끊기가 쉽지 않고 가끔 한손의 손가락 한 마디만 다쳤을 때도 한 손으로 씻기와 글쓰기 등의 불편함이다. 이 때 비로소 작을 수도 있는 부분의 역할이 소중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알게 된다.

그래서 주먹을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된다. 주먹을 잘못 휘둘러 행여 손가락을 다치면 몸 전체가 불편하게 하는 민폐를 끼친다. 일부분의 역할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행동거지에 불편함과 영향을 끼치게 된다. 조직이나 사회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분들이 각자 머리라 자처하고 몽니를 부리며 오만의 주먹을 휘두를 때 조직이나 사회적 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다.

역할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은 부분의 역할에 소중함이나 조직의 운영이치를 성찰하지 못하는 무지함에도 비롯된다. 더불어 머리만 되고자 하는 것이다. 더 냉정하게는 제 이익 즉 사익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때론 사실을 호도하고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이 흔들림을 깨울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양심이다.

살다보면 순간적으로 양심을 저버리는 경우도 종종 할 수 있다. 다만 만성적일 경우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될 수도 있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고 유기적 조직체를 깨는 불순물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오만함이 커질수록 양심을 점점 구석으로 밀쳐 내고 유명무실화 하게 하고 그 역할을 마비시킴으로써 종국에는 머리의 속임수에 지배당하게 된다.

양심의 무게는 사칙연산(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의 측면에서 보면 첫째, 자성과 성찰에 의해 더해지며 둘째, 유기적 결합체로서 손가락의 역할과 소중함을 경시하고 머리의 오만함과 자기이익에 지배당할 때 아무리 많이 쌓았던 양심도 빠져 나가게 된다. 셋째, 스스로 판단과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평판이 합일치 되었을 때 곱절이 되며 넷째, 관계하는 사람의 수나 영향력에 따라 잠시 엇갈리거나 나누어지기도 한다.

결국 양심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동물의 세계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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