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청주교도소(현 탑동)에서 옥사한뒤 시신은 뒷동산에 버려져

레미제라블 열풍이 뜨겁다. 젊은층은 혁명가 마리우스로부터 힐링을 얻는다. 한때는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의 열풍도 뜨거웠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열정적인 혁명가가 있었다. 일제 강점시기 불꽃같은 혁명가의 삶을 산 이재유. 지금 그는 청주시 탑동 원불교 뒷동산에 묻혀있다. 누군가의 기억속으로 그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기다리면서

이재유는 1903년 함경남도 삼수군에서 가난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혼자 독학했다. 고향을 떠난뒤 사립보성고보고에 편입했으나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1927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본에서 검거돼 서울로 압송됐다. 이때부터 그의 신출귀몰한 탈옥이 시작된다. 특히 세번째 탈출은 일본경찰을 경악하게 했다. 1934년 6월13일 밤, 손에 자동수갑을 차고 발에는 커다란 쇳덩어리를 붙들어맨 데다가 허리에는 또 방울을 채워 그야말로 옴치고 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이재유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제아무리 탈출의 귀재 소리를 듣는 이재유였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32년 12월 22일 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해 1936년 12월 25일 다시 붙잡힐 때까지 만 4년 동안 이재유는 불꽃 같은 사회주의자의 삶을 산다.

1933년 서울일대에 있는 노동자를 조직하고 고무·방직·제사 산업부문의 10개 파업을 주도했다. 1934년 경성트로이카 그룹을 결성하고 △일본제국주의 타도 △대토지 소유의 해소 △7시간 노동제 확립 등을 임무로 삼고 활동했다. 1936년 12월25일 이재유는 일 경찰부의 다나카 고등과장을 우두머리로 한 32명의 잠복조에게 체포됐다.

1944년 10월 26일, 41살의 나이로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숨을 거뒀다. 사랑과 혁명을 채 못이룬 그의 시신은 청주교도소 뒷산에 버려졌다. 이후 그의 경성트로이카 동료였던 박헌영은 북한으로부터 미제스파이로 몰려 죽었고 김삼룡은 남쪽에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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