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문화예술부장

이름 모를 그 무엇과 대화를 나누며 한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고, 대자연의 풍광속으로 들어가 앙탈진 가슴의 고름을 짜내려 한다. 때로는 바람의 현을 타고 일렁이는 꽃송이들이 거친 내 삶을 매만져 주기를 고대하지 않던가. 서울 사람들에게는 더욱 간절하다. 질펀한 거리를 한시라도 떠나고 싶고 새로운 세상, 새로운 대자연과 등목을 하며 삶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런데 서울시내 한 복판에 이런 꿈만 같은 일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사는 행복한 마을이 있다.

소소한 일상이 주는 삶의 참맛을 누리면서 모두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주민 스스로 만들어가는 마을이 있는 것이다. 다름 아닌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마을 이야기다.

성미산마을은 1994년 젊은 부모들이 모여 공동으로 육아를 하기위해 어린이집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대안학교, 생활협동조합, 공동주택, 마을극장 등을 공동 출자로 만들고 함께 운영하면서 만들어진 공동체 마을이다. 이곳의 주민 1천 여명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춤을 추고, 함께 내일을 향해 자분자분 걸어가는 공동체 생활을 한다. 골목마다 작은 도서관과 갤러리와 카페와 공터가 있고 연극, 밴드, 풍물패, 드로잉, 사진, 영상, 시문학 등 100여개의 동아리가 있어 계절별 거리축제 시간이 되면 흥겨운 잔치마당이 된다.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어린이집은 조합원들이 운영, 청소, 식사 등의 경영 전반을 공동으로 책임지고 조합원들이 고용한 교사들은 온전히 교육만 담당한다. 공동의 교육 철학으로 운영되는 이곳은 아이들은 자연과 벗 삼아 호흡하고 가정집처럼 편안하게 보살핌을 받기 때문에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다. 조합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최대한 반영하여 운영하기 때문에 맞벌이 부부들에게 안성맞춤이다.

▲ 동네책방_개똥이네 책놀이터

어린이집을 다니던 아이들이 자라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부모들에게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틀에 맞춰진 기존의 공교육을 대신해줄 이른바 ‘참 학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시 뜻을 모아 자신들이 원하는 학교를 스스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된다.

▲ 성미산학교
2004년 9월, 초중고 통합 12학년제로 운영되는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는 이렇게 탄생했다. 운동장도 없고 정식 인가를 받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은 체육과 예술과 생태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경쟁하며 쫓기듯 살아가는 여느 학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방학에는 마을 배움터를 만들어 더 멋진 추억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준다. 이 마을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매년 성인식을 열어주고 나무심기에서부터 청소와 분리수거와 골목길 가꾸기와 재활용 등을 솔선수범케 한다.

동네 사람들의 참여와 소통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마을극장은 이곳의 또 다른 자랑거리이다. 연극, 영상, 밴드, 사진 등 함께 모여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스스로 만든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로 탄생한 이곳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동네 놀이터다. 성미산 마을극장에서는 장르의 경계를 넘어, 프로와 아마의 경계를 넘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넘어, 세대와 공간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주인이 되는 다채로운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마을극장이 다양한 취미활동을 위한 문화 놀이터라면 아이들에게 유기농 아이스크림을 먹이기 위해 시작한 ‘작은나무카페’는 이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낮에는 주부와 아이들을 위해 커피와 차, 유기농 아이스크림을, 저녁에는 직장인들을 위해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판매한다.

또 음악회, 전시회와 같은 작은 문화 행사를 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이마을 주민들은 유기농슈퍼, 서점, 바느질공방, 비누공방, 웰빙 빵집과 밥집, 동네병원, 반찬가게와 힐링아트 같은 다양한 시설과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운영한다. 심지어는 삶과 쉼과 놀이와 나눔이 함께 이루어지는 공동주택도 있다. 아랫집 윗집 할 것 없이 모두가 기쁨을 함께하고 아픔을 나누는 공동체 생활을 한다.

▲ 성미산 마을극장

이러니 골목길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돈으로 칠하고 심고 세운 것이 아니라사람의 손길과 사람의 마음으로 마을을 가꾸었기 때문에 시골의 뒷골목 풍경보다도 더 서정적이다. 사람들의 표정에서부터 구석구석의 속살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다. 거리와 생태와 삶과 문화가 하나 되는 세상, 꿈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 바로 성미산마을인 것이다.

물론 이 마을 사람들에게 아픔이 왜 없었겠는가. 크고 작은 이해관계가 얽혀 충돌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렇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위기의 고비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협력하는 노력으로 극복했다. 정부의 개입이나 지원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결실을 맺었고, 이제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옆 동네로 전파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골목길을 걷던 중 나는 검게 그을린 아이들 10여 명이 좌판을 깔아놓고 있는 모습에 시선이 끌렸다. 쌀과 과일과 견과류 등이 포장지 속에 담겨 있었고 무슨 작당을 벌이려는지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고 있었다. 뽀얀 얼굴의 도시 아이들이 아니었다. 시골촌놈들이 서울구경 온 듯 했다.

아이들에게 어디에서 왔느냐,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느냐, 이것들은 다 뭐냐고 물었다. 서울 한 복판 성미산마을의 아이들이었다. 지난 1년 동안 강원도 평창에서 농사지은 것을 가져와 팔고 있는 것이란다. 아이들의 거침없는 대답과 입술을 비집고 쏟아지는 희망의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내게도 저만한 또래의 자식이 있는데 어찌 이리 틀릴까. 나는 나의 생명들에게 무슨 희망을 주고 있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 성미산 공동육아 우리어린이집

골목길에서 만난 중년의 아줌마는 장독대를 기웃거리는 내게 말을 건넨다. “좋지요? 이곳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동네예요. 옛날 시골처럼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앞집 뒷집 할 것이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으니까 맘이 편해요. 도시 아이들의 탈선과 폭행? 이 동네는 그런 걱정 안하지요.” 그것도 그럴 것이 아이들의 육아를 공동으로 하다 보니 동네사람들은 모두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이 누구인지, 뉘 집 자식인지 다 알기 때문에 안전하게 방목시킬 수 있는 것이다. 동네에 천개가 넘는 CCTV가 아이들을 지키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성미산 두레공방에서 비누를 만들던 젊은 여인은 결혼과 동시에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시작은 아이들 교육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얄팍한 수작이었지만 지금은 동네 주부들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며 공방까지 운영하고 있다. 어차피 이 동네 사람들도 비누와 옷과 반찬 등 생필품이 필요한데 스스로가 믿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들고 공급하면 좋겠다는 뜻에 동참한 것이다. 남편은 퇴근하면 마실 다니는 재미가 솔솔 하단다. 학력과 경력과 직업과 경제적 능력을 떠나 맘 편하게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운다.

성미산극장에서 일하는 청년은 성미산마을의 가장 큰 성과야말로 함께 마음을 나누는 삶, 경계가 없는 문화, 사람들의 꿈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청년은 부인이 이 마을에서 보육교사로 일하면서 이 동네를 알게 되었고, 내친김에 이사까지 와 5년째 극장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다른 동네사람들과 틀린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청년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함께 나누고 협동하려는 마음이라고 한다. 주민 스스로가 참여하려 하고, 의사결정과정을 중시하며, 양성평등이 이루어지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는 멘토와 지원을 하며, 다양성을 인정하고, 소수의 의견도 소중히 여기는 토론문화가 정착돼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꿈꿔온 것이 있다. 내 고향 초정에 역사와 문화와 생태,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가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마을을 일구고 싶었다. 안덕벌과 수암골과 서운동 일원을 낮고 두터운 도시, 깊고 느린 마을 공동체로 꾸미고 싶었다.


갤러리와 카페와 미술관과 박물관과 공방과 거리예술이 물결치고, 돌담 사이로 악동들이 춤을 추고 골목길마다 텃밭과 생태가 조화를 이루며 아픔이나 두려움이 없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내가 꿈꾸는 마을이 청주가 아니라 공룡 같은 도시 서울의 한 복판에 있다니….

이웃의 의미가 퇴색되어 지고 있는 이 회색도시에서 성미산 마을이 보여준 마을성의 회복은 하루하루 거칠게 살아가고 있는 내 일상에서 참다운 마을살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문제는 사람과 시스템이다. 통합청주의 미래는 바로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에 온 몸이 고압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떨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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