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국 한국교통대 전자공학과 교수

세상에 이름깨나 알려진 이가 자살하면 자살 검색은 2.5배가 증가하고 자살 건수는 1.7배나 늘어난다고 한다.

며칠 전 조성민 씨가 자살했다. 전 아내 최진실이 자살해 세상에 커다란 충격을 줬고, 이제 그마저 절망의 구렁텅이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 세상을 스스로 떠났다.

대한민국이 자살공화국이라 불리고 있다.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2명으로 OECD 회원국 평균의 3배에 이른다.

하루에도 42명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는 얘기다. 특히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젊은이들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니 기막힐 노릇이다. 4,50대에는 사망원인이 2위가 자살이지만 자살률은 늘어나고 노년층에 이르러서는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한다. 80대에는 인구 10만 명당 117명이 자살한다는 통계다. 대한민국이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자살로 1년에 1만 5천명이 넘는 국민이 죽어가고 있다니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노인 자살률이 특히 높은 데는 이런 이유가 반영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절망의 그림자가 늘 그들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살거나 병든 노부부가 가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며 자신들의 젊은 시절처럼 대가족의 가족개념을 그리워한다면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절망이리라.

청소년을 우리처럼 강제하는 선진국이 있을까. 초등학교부터 아니 어린이집으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갈 때부터 경쟁을 강제하는 사회문화 속에서 그들의 웃는 얼굴 보기가 어디 쉽겠는가.

‘1등만을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고 우왕좌왕하는 꼴이다. 청소년을 행복하게 해야 할 교과부는 오히려 그들을 경쟁 속으로 매몰시켰고 성적평가를 상대평가로 하여 친구를 없애버렸고 학교에 대한 지원은 평가로 결정하니 학교 간에는 협력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지 오래다.

복지, 이번 대선의 최대 화두였다. 어찌할 건가. 어린 국민에게 희망의 정치를 펼치면 된다. 국민을 절망하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 이 나라는 절망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이 가장 심각한 지경에 처해있는 지를 파악하고 그들부터 희망의 빛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어느 사회든 절대 약자가 있다.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와 노인이 그들이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일할 수 없는 약자다. 나라가 보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진국이라면, 선진국이라고 자랑하고 싶다면 그들의 삶 속에서 웃는 얼굴을 매일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냄새에 민감한 어린아이들이 그런 노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든다면 최상이다.

최상의 복지는 젊은이를 일하게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열심히 일하는 사회가 살기 좋은 나라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일할 곳을 구할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 파묻혀있다. 그들이 일할 곳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정치권이, 아니 박근혜정부가 발송해야 한다. 한시가 급하다. 절망은 자살의 친구지만 희망은 자살의 적이기에 그렇다.

이제 새로운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크다. 국민이 희망의 빛을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절망의 구렁텅이 속을 헤매는 이들을 희망의 횃불을 높이 들어 이끌고 나와야 한다. 박근혜정부가 그리 했으면 좋겠다. 그런 살기 좋은 나라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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