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규 목사, 대낮에 성안길 배포해 포고령 위반 3명 구속

5 18 광주민주화운동이 계엄군의 총칼로 진압되고, 대한민국은 군사정권의 서슬에 눈멀고 귀멀고 입까지 막힌 상태가 됐다. 어느 누구도 광주를 말할 수 없었던 엄혹한 상황에서 마침내 진실의 목소리를 터뜨린 청주 사람들이 있었다. 80년 6월 당시 청주기독청년회장이었던 김창규 목사(49 민족화합운동충북연합 상임대표)와 도시산업선교회 조순형 전도사(55)가 광주에 대한 침묵을 깼다.
두 사람은 김준태 시인이 5 18 광주의 비극을 쓴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등사한 유인물 수백장을 청주시내와 대학 도서관 등에 뿌렸다. 전남대에서 작성한 광주백서의 내용도 담아 조 전도사와 밤새 등사작업을 했고 이른 새벽에 배포작업을 했다. 광주자료를 우편으로 전달받은 사람은 농민운동을 하던 이유근씨(56)로 공범으로 몰려 함께 고초를 겪어야 했다.

   
▲ 김창규 목사는 광주 유인물 배포와 함석헌 목사 강연회 때문에 2차례나 구속됐다. 청주 YMCA의 함목사 강연회는 사실상 광주민주화운동 1주년 기념식이 됐다./ 육성준 기자
“김준태 시인의 시를 읽는 순간 뜨거운 전율이 느껴졌다. 광주의 현실이 바로 이것이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실을 알려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낮에 대학 도서관과 성안길에서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했다. 뿌리다보니 부족해서 평소 안면이 있는 충북적십자사 20대 사환을 통해 다시 등사해서 돌렸다. 결국 배포한 지 3시간만에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쳐 연행됐다”
군경합동수사대로 넘겨진 김 목사는 모진 고문을 받았고 조 전도사와 함께 유언비어 유포에 따른 포고령 위반죄로 구속됐다. 다행히 대전 군사법정에서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져 구속 3개월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군수사대에서는 내가 김대중씨로부터 활동자금을 받았다는 허위진술을 자백받기 위해 모진 폭력을 가했다. 그때 고막이 터지고 틀니가 부려지기도 했다. 무릎관절 이상도 그때 당한 후유증이다” 김목사는 이때 전과(?)로 인해 사목활동을 하던 교회에서 배척당하는등 최근까지도 피해를 당했다. 당시 유인물 배포사건에 관련된 3명은 지난 99년 광주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밖에 광주항쟁 직전 도내에서 지역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학생 운동권과 지역 인사 25명이 민주화 유공자로 선정됐다. 80년 당시 민주화의 봄을 맞아 ‘계엄해제’ ‘조기선거’를 촉구하는 학내외 시위가 잇따랐고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지도부 학생들에 대한 검거열풍이 휘몰아쳤다. 당시 충북대 3학년이었던 김재수씨(45 민주노총충북본부 사무처장)와 부산대 3학년 휴학중인 최종철씨(81년 9월 사망)는 청주 수동의 보안부대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최씨는 11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고문후유증으로 시달리다 이듬해 고모집에서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뒀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경찰의 제지로 시신마저도 고향땅에 묻히지 못한채 벽제화장터에서 한줌 재가 되버렸다.

광주민주화운동 1년뒤인 81년 5월 16일 청주YMCA 강당에서 열린 함석헌 선생 초청강연회도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강연이 끝나자 대학생들은 광주학살의 진상이 담긴 유인물을 뿌리고 단상의 마이크를 통해 ‘전두환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때 김성구씨(우리밀충북본부) 정지성씨(제85회 전국체전기념 전국봉화제추진위원장) 이승원씨(당시 충북대생)가 집시법위반혐의로 구속됐다. 또한 강연회를 기획한 김창규 목사는 현장에서 검거돼 광주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된 지 1년만에 또다시 수감되는 처지가 됐다.
지역 재야인사들은 5 18 광주항쟁 전후 지역 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한 신언관씨(정당인) 오동균신부, 이승원씨 등 본인이 신청을 거부해 광주민주화유공자 명단에 빠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