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으로 살다 바람같이 떠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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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으로 살다 바람같이 떠난 이
  • 충청리뷰
  • 승인 2002.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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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부터 간암으로 투병중이던 동범(東凡) 최병준선생이 운명했다. 지난 11일 밤10시께 청주의료원에서 71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30대에 최장수 청주문화원장으로 지역 예술단체의 기초를 놓았던 고인은 89년 충북시민회(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의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지역 시민운동단체의 ‘큰 어른’으로 인정받아 왔다. 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때는 정부여당의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공명선거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면서 정권의 미움을 받아 이후 10년간 일체의 대외활동을 규제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소리없이 욕심없이 한평생을 사셨던 최병준선생의 삶을 정리해 본다.
고인은 1932년 진천군 초평면에서 태어나 청주사범학교를 다니다 45년 서울대 사대부고로 편입학했다. 55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청주로 내려와 지역의 문화예술인들과 교분을 쌓아갔다. 정치학을 전공한 고인은 대학시절 지역출신 시인 신동문(작고) 등과 시낭송회에 참여하는등 문학적 관심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재산가인 민병산씨의 저택과 성안길 오페라 다방에 모여 담론을 나눴다. 마침내 57년 1월 충북문화인협회가 정식 발족했고 취지문을 낭독한 고인은 상임위원으로 선임됐다. 초대회장은 송경호씨가 선출됐고 부회장으로 오세탁·송경호·박인규씨등이 자리잡았다. 충북문화인협회는 59년부터 문학, 미술, 음악, 연극이 어우러진 충북예술제를 창설해 종합예술제의 효시가 됐다.



선임된 고인은 13년간을 봉직, ‘청주근세 60년사화’에는 문화원의 ‘트레이드 마크’로 소개하기도 했다. 고인의 약력 가운에 눈길을 끄는 대목은 고교교사로 1년여 재직한 사실이다. 서울대 출신의 재원이었던 고인은 59년 청주기계공고, 청주여고 교사로 강단에 섰고 이때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인 김영애 여사(66)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청주문화원장으로 대외적인 활동영역이 넓었던 고인은 1년만에 사직서를 내고 지역예술단체 일에 전념하게 된다.
당시 문화시장으로 통했던 홍원길 청주시장의 이해와 지원으로 청주문화원의 내실을 다지는 가운데 5·16군사쿠테타가 발생했다. 이에따라 충북문화인협회는 타의에 의해 해체되고 62년 전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충북도지부가 다시금 결성됐다. 임원선거에서 고인은 초대지부장으로 당선돼 문화원장직을 겸임하게 됐다. 69년에는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장을 맡아 미국무성 초청으로 3개월간 구미 각국을 순방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고인의 운명을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71년 ‘공명선거 파동’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정권탄압의 대상자가 됐던 것. 당시 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의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자 고인과 중앙일간지 지사장등 지역인사 11명은 연명으로 국회의원 선거를 공명선거로 치르자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했다. 유인물에는 ‘관권, 금권선거 타파’와 ‘공무원, 동·반장의 불법선거운동’을 공박하는 내용이 담겨 여당측에서는 촉각을 곧두세울 수밖에 없다. 특히 이같은 공명선거 캠페인의 결과로 4차례에 걸쳐 낙선고배를 마셨던 야당출신 최병길후보가 공화당의 정태성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하게 됐다.
하지만 선거직후 지역 정보기관등의 사주로 고인은 문화원장, 예총지부장직을 박탈당했다. 당시 공화당의 실력자로 충북연고가 깊었던 육인수의원이 고인의 공명선거운동에 대해 분을 삭이지 못했고 정치적인 보복을 가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공화당 입당제의를 거절한 전력이 있는 고인이었기에 권력의 칼질은 단호했다. 단체장직을 내놓은 고인은 유신체제와 함께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고립된 칩거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시련속에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 75년부터 부정맥과 심장기능 이상으로 약물치료를 받다가 78년 쓰러져 수술대에 눕게 된다. 이때부터 가슴속에 인공적인 심장박동기를 넣고 살 수밖에 없었고 5년 교환주기로 생전에 4차례나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당시 지역문화예술인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치료비 모금운동이 벌어져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기도 했다. 이후 건강회복과 함께 전두환정권 출범이후 규제가 풀려 82년 청주문화원장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40대의 10년 세월을 칩거했던 고인은 청주로타리클럽등 친목단체 활동에도 적극 나서 남궁윤 박사와 총재·총장을 맡아 단짝을 이루기도 했다.
90년 청주시민회의 산파였던 정영수변호사의 부탁으로 초대회장 맡게 된 고인은 이후 청주경실련 공동대표, 호남고속전철 오송역유치 추진위원회 부위원장, 문장대 용화온천저지 도민대책위 부위원장, 먹는물 관리법 제정 도민대책위 공동대표, 충북 실업극복시민사회단체협의회 상임대표, 충북총선시민연대 공동대표,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대표회장등 시민운동 단체의 어른으로 활동하게 된다.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송재봉사무국장은 “90년대초 시민운동 초장기에 회장님이 우리 활동가들을 이끌고 남주동 먹자골목에서 막걸리를 사시곤 했다. 혼자 다니실 때는 늘 시내버스를 타셨고, 신발이 너무낡아 시내에서 만난 모지역인사가 제화점으로 급히 모시고가 구두를 사드리기도 했다. 물욕없이 꾸밈없이 사신 분인데…, 뜻하지 않은 시련으로 한을 품고 떠나신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고 회고했다.
최병준선생의 미망인 김영애 여사(66)에 따르면 고인은 생전에 ‘여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는 것. “워낙 말수도 적은 분이지만 정 할 말이 있으면 가까이 다가와서 ‘저기’로 부르곤 했다. 간혹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내가 불만을 얘기해도 한두마디 대꾸만 하시곤 입을 다물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되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식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되뇌이셨고, ‘난 이대로 안죽는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김여사의 말이다. 가장으로써 경제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들에게 마음의 ‘빚’으로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인이 평소 가장 아끼던 물건은 선친때부터 쓰던 낡은 괘종시계였다. 자신의 책상머리 위에 걸어두고 틈만나면 닦고 기름치는 일을 되풀이했다. 효심이 두터운 고인이 선친에 대한 그리움으로 괘종시계에 집착했고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지난 8월 간암진단 직후, 63년간 작동해온 고인 방의 괘종시계가 고장으로 바늘이 멈추고 말았다.
맏딸 현주씨(39)는 “자식에게도 민주적인 아빠셨다. 우리들을 전적으로 믿어주셨고 격의없는 대화상대가 되주셨다. 결혼후에는 수년동안 매일처럼 아버지와 통화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고인의 왕성한 사회활동 뒤에는 교사로 재직하며 가정생계를 이끌어온 김여사의 노고가 자리잡고 있다. “월급봉투를 받아본 때는 현양원 이사로 계시면서 40만원씩 내놓으신게 전부다. 가정경제는 으레 내가 알아서 챙기는 것으로 살아왔다. 올봄에 수사기관에서 조사한 후원금 문제도 나는 알지도 못하다가 대한투자신탁에서 연락을 받고 그 분 명의로 입금된 사실을 알게됐다. 그때도 공금이지 개인돈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결국 여동생네가 부도가 나고 집에 가압류가 들어오자 그 돈 가운데 2000만원을 빌려주었다가 이렇게 뜻하지않은 봉변을 당한 것”이라며 “그 분이 45세때 쓰러져서 큰 수술을 받고나서는 ‘나는 덤 인생’이라는 말을 자주하셨다. 생전에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영결식 내내 죄책감으로…” 김여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후원금 사건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고인은 지난 3월 일체의 시민단체장직을 사퇴했다. 그로부터 5개월 뒤 간암이 발병했고 담당의사도 ‘극심한 쇼크와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진단했다. 한편 수년간 고인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이번 사건에 휘말리게 된 이경열씨는 재판정에서 고인의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는 반응이다. “최회장님은 김영세교육감 사건으로 애꿋은 피해를 당한 것이다. 평소부터 존경해온 회장님과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인데 어떻게 이런일이 발생했는지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재판정에서 최회장님의 억울한 사정을 증언하려 했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시다니 너무나 안타깝다. 할 수없이 김교육감측 변호인에게 부탁해 오는 28일 그쪽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최선생님의 결백과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고 말했다.
/ 권혁상 기자



추모시 윤석위 (민예총 충북지부장) 어둡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상처가 상처를 쓰다듬고 상처가 마음을 굳게 다져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모자란 듯 살거나 아니면 재빠르게 눈을 감고 어둠에 몸울 맡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어둠속 외로운 등불하나 성안길 골목에서 중앙공원 은행나무까지 흔들리며 걸어가는 것을 소리없이 지켜본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한 개의 등불은 수백 수천의 등불이 되어 시대의 새벽을 불러내었고 꺼지지않고 거리를 밝히는 큰 빛이 되었습니다. 깃발이 되어 달라면 큰 깃대와 함께 기꺼운 깃발이 되어주었고 등불이 되어 달라면 아낌없이 자신을 태워 등불이 되어 주었고 단 한번도 노하여 소리치지 않았어도 따뜻한 목소리 더 큰 메아리로 돌아오게 했던 그 빛과 같던 이 그 썩지않는 소금같던 이 맑은 바람같던 이 오늘 그 이를 보내드리며 가슴깊게 울리는 소리로 그 이를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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