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지지후보 없이 표류… 현장에선 한숨 소리
정치주체가 아니라 영입대상으로 전락, 후보만 난립

18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금 노동계의 시름과 무기력이 깊어가고 있다. 1995년 민주노총 창립 이후 치러진 네 번의 대통령선거에서 이번 선거처럼 노동계의 존재감이 미약한 적은 없었다. 민주노총과 지역 노동계는 노동이슈를 부각시키기는 커녕 지지후보조차 정하지 못했다. 지난 세 번의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노총위원장 출신의 권영길 후보를 앞세워 “노동자는 노동자후보에게”라는 구호를 앞세워 노동자 계급투표 운동을 진행했던 그 기세는 온데간데 없다.

▲ 18대 대선에는 2명의 노동자 후보와 2명의 진보정당 후보가 출마했지만 1995년 민주노총 창립 이래 이번 선거처럼 노동자의 존재감이 미약했던 적은 없었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노동자대회 한 장면. / 충청리뷰DB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일선 현장의 분위기는 더욱 썰렁했다. 도내 민주노총 소속의 최대 제조업 사업장인 엘지화학, 예전 같으면 노동자 지지후보에 대한 선전물과 현수막, 세액공제 포스터로 도배됐을 노동조합 사무실이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투표를 독려하는 포스터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엘지화학노조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업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내 민주노총 소속의 한 노조간부는 “선거와 정치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 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 간부는 “역대 이런 선거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진보정당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노동정치의 이런 무기력을 자초한 것은 민주노총이 정치방침을 정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민주노총충북본부의 한 간부는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에 대해 “투표에 참여하라고 조합원을 설득하는 것, 그리고 영화 ‘남영동 1985’나 ‘26년’과 같은 영화를 보는 것” 정도라고 설명했다. 한때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던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하다.

4명의 노동자·진보정당 후보

18대 대통령선거는 민주노총이 지지후보조차 정하지 못한 최초의 선거였지만 노동정치를 전면에 내세운 후보는 자그마치 4명이나 됐다. 투표일 3일전에 사퇴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와 후보등록 직전 사퇴한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 90일간의 단식투쟁을 통해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인 전 기륭전자분회장이였던 김소연 후보, 그리고 울산대학교 비정규직 청소용역노동자 출신인 김순자 후보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들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주목을 끌지 못했다. 주목은 커녕 민주노총이나 노동조합대표와 간부들의 집단적인 지지선언조차 끌어내지 못했다. 선거운동을 진행할 도내 선거운동기구는 10여명 내외로 단촐하게 구성됐다. 물론 여기에도 현직 노동계의 참여는 거의 지지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계가 빠진 자리는 지역의 장애인 운동단체, 교육단체등이 가까스로 메웠다. 이로인해 장기투쟁 사업장, 노조파괴가 있었던 사업장등 도내의 노동현안도 일절 주목을 끌지 못했다. 충북지역은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 공작이 집중됐던 곳이고 그 피해로 장기간 농성을 진행하는 굵직한 현안이 있음에도 전혀 부각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현장은 침체에 빠졌지만, 노동조합 상층의 움직임은 바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깃발을 두고 문재인, 안철수 캠프로 전현직 고위 간부들이 대거 이동했다. 이석행 전 민주노총위원장, 유덕상 전 민주노총위원장 직무대행등 간부들이 문재인 캠프로 흡수됐다.

청원군에 소재한 카스맥주(전 오비맥주)의 위원장을 역임했고 민주노총부위원장을 지낸 배강욱씨는 안철수 캠프로 이동했다. 노동정치의 상징인 권영길 전 민주노총위원장은 무소속으로 경남도지사 보궐선거에 출마했고, 이수호 전 위원장은 서울시 교육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노동 현장의 목소리는 달갑지 않다. 민주노총 소속의 노조 위원장인 주모씨는 “화마에 그을린 본댓집을 버리고, 아버지가 혼자 살겠다고 각자 도생하러 간 것”이라고 힐난했다. 이처럼 현장 노동자들의 눈에는 상층중심의 개별 정치활동이 진정성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노동 없는 경제민주화 가능할까?

이렇게 노동정치의 무기력을 자초했다고 비난을 받고 있는 민주노총은 지난 달 25일 성명을 냈다. 전현직 간부의 이탈에 대한 성명에서 “최근까지 민주노총의 상층 간부로 활동했던 일부 인사들이 문재인·안철수 대선캠프에 일신을 의탁하는 행보는 노동정치에 대한 현장의 불신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진보정당 통합의 실패와 분열을 막지 못한 채 중심을 세우지 못한 민주노총의 책임을 인정한다”면서도 “최근까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함께 논의하며 동지라 칭했던 이들이 떳떳하게 이탈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민망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추진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방향은 여전히 굳건하다”며 “노동을 영입의 대상이 아닌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를 진정성있게 바라보는 현장 노동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이 성명이 발표된 지가 한달이 흘렀지만 민주노총은 아무런 후속대책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동정치가 무력화 되면서 우려의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민과 그 다수를 점하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기업과 경제 운영에 고려되는 것이 경제민주주의인데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직되는 것의 결과로 경제민주화를 말하는 후보는 없다”면서 “ ‘재벌은 이렇게 다루겠다’ ‘일자리를 늘려주겠다’ ‘비정규직을 줄이겠다’는 후보들의 언어 자체가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박 대표는 “지금은 시민과 노동자가 수동적인 백성이 된 느낌이고 후보들이 당선되면 ‘내가 뭘 해주겠다’고 하니 엄밀히 말하면 민주주의가 아니라 군주정”이라며 “지금은 노동과 관련해서 온정주의적 군주를 누가 잘 뽑느냐를 다투는 선거를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노동계 내부에서도 “문재인후보가 나름 진보정당이 취해왔던 노동정책을 받아들였지만, 어디까지나 시혜적이고 은혜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는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은 97년 권영길 이전의 정치로 돌아간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의 시각을 종합해보면 우리사회의 유익한 발전을 위해서도 노동정치는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이번 대선에서 드러난 노동정치의 무기력과 안타까움을 노동계가 어떻게 헤쳐나갈지 노동계의 향후 행보를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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