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 김태준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재학

흔히들 백제 21대 개로왕과 마지막 31대왕인 의자왕을 폭군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21대 개로왕이 폭군이라는 것은 도미부인이야기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즉 거짓이라는 얘기다. 개로왕은 한성(서울)의 마지막 왕으로서 아버지인 20대 비유왕은 정변으로 암살당했다. 일본서기에도 개로왕을 재위 14년까지 가수리군 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반란군과 싸웠다는 얘기다.

삼국사기 기록에 도림이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있다. 즉 재위 마지막인 475년까지 선왕의 무덤이 안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개로왕이 472(개로왕18)년에 북위황제에게 보내는 글을 보면 가히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보면 될 것이다. 즉 도미부인 이야기는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의자왕을 살펴보자. 의자왕 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부터 해동증자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성군의 정치를 할 것만 같은 이미지였다. 그러나 오해가 있다. 의자왕이 20대에 왕위에 올랐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의자왕이 왕위에 오른 나이는 40~50대중반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의자왕의 맏아들 부여 융이 615년생이라는 묘지명에 의해서다. 40대라는 왕성한 시기에 왕위에 올라서 초반에는 신라를 위협 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숙청시키던 왕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가 먹는 법. 재위 19년 의자왕의 나이 60~70대로 그의 힘은 약화되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정치가 싫어지고 결국 귀족들에게 떠넘기게 된다. 재위 20년 나·당연합군이 사비로 쳐들어오자 황산벌에서 계백으로 막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결국 의자왕은 웅진(공주)로 피신을 한다. 사비는 함락되었으나 수도만 함락했을 뿐 지방 세력은 그대로이고 왕 또한 항복을 안 한 상태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웅진방령인 예식진이라는 자가 의자왕을 포박해 나·당연합군에 바치면서 항복을 하게 된다.

자!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의자왕이 당나라에 잡혀가는 날에 백제 백성들은 슬퍼했다고 한다. 과연 의자왕이 폭군이면 백성들이 슬퍼할까? 지금도 부여지방에는 산유화가라는 노래가 전해져 온다. 산유화가는 의자왕을 기리는 노래인데, 의자왕 그가 폭군 이었다면 과연 백성들이 그를 기리는 노래를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의자왕의 폭정은 나·당연합군이 만들어 낸 허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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