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 따라 일정시간만 돕는 활동보조제도 개선 시급
도내 청주·청원·제천만 추가서비스 제공 ‘지역차별’

10월26일 새벽 2시쯤 서울 성동구 행당동의 한 주택에서 화재사고가 일어났다. 불은 10분 만에 꺼졌지만, 혼자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뇌성마비 중증 장애여성 김주영(여·34세)씨는 화염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김씨는 정부와 서울시로부터 월360시간의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막상 화재가 났을 때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뒤였다.

▲ 지난달 26일 서울 행당동의 주택 화재로 숨진 고 김주영씨의 생전 모습.

화재가 발생했을 때 김씨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119 응급벨을 누르는 것이 전부였다. 고 김주영 씨의 장례가 치러지던 30일, 이번에는 경기도 파주의 한 아파트에서 장애가 있는 남매가 화재로 인한 유독가스를 마시고 중태에 빠졌다. 아이들의 어머니가 월세 방을 구하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일어난 일이다. 13세 누나는 11세 중증장애인인 동생을 데리고 방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탈출하지 못했다.

전 달에는 집에 홀로 있던 30세의 근육장애 남성 허 모씨가 인공호흡기가 빠져 목숨을 잃은 사건도 발생했다. 허씨는 24시간 호흡기를 부착해야만 생명이 유지되는 상태였고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다. 허씨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는 이유로 1달에 100시간 정도의 활동보조를 받고 있었지만, 활동보조인이 퇴근하고 가족이 집에 오는 사이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또 2005년 겨울에는 경남 함안에서 혼자 살던 중증장애인이 방안에서 수도관이 터져 동사(凍死)한 사건도 있었다.

김주영 씨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사회의 빈약한 장애인활동보조지원제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김씨의 죽음에 대한 성명을 통해 “다른 나라들이 수십 년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하루 24시간 활동보조가 필요한 사람에게 충분히 보장이 되었더라면 그녀는 활동보조인의 도움으로 쉽게 대피하여 이와 같은 참변은 충분히, 너무도 당연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장애인활동지원 제도를 비판했다.

빈약한 지원, 제도개선 한 목소리

이 단체 김정하 조직실장은 “한국에서 장애인이 복지제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장애등급을 잘 받아야 하고, 가족이 가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착순 복지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사실상 별로 생활에 도움 될 지원을 받기 어렵다”며 이를테면 “1급 장애인이 아니면 거동이 아무리 불편해도 활동보조를 신청할 수 없고, 1급 또는 2급장애인이 아니면 아무리 빈곤해도 장애인연금을 신청할 수도 없다. 보행이 불편해도 장애인콜택시 이용도 못하고, 3급 장애인 이내에 들지 않으면 감면제도도 별게 없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또 “정부가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1988년에 일본의 장애등급제를 모델로 우리나라에도 장애등급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의 장애등급제도는 유명무실해져 한국만이 유일하게 장애인의 몸에 등급을 매기고 등급을 이유로 서비스를 제한하는 나라”라고 주장했다. 또 “어떤 나라에서 고깃덩어리에 1등급, 2등급 매기듯이 사람 몸에 등급을 매기는가”라며 장애등급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전국적으로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해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이 35만명에 달한다. 하지만 서비스를 제공받는 대상은 겨우 5만명에 불과하다. 우리 충북지역에는 등록된 장애인만 9만4600백명에 달한다. 이중 장애1급은 8287명이다. 장애1급이라고 해서 무조건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국민연금관리공단이 또 등급을 매긴다. 이 평가점수가 220점 이상을 초과해야만 비로소 지원대상자가 된다. 결국 8000여명 중에서 20%정도만 활동지원서비스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35만 명 중 서비스 제공은 5만명뿐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비로 제공되는 최대 월180시간의 서비스 시간 외의 부분은 광역·기초 지자체에서 별도로 정한다. 충청북도는 이들 중 최 중증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월 최대 80시간을 제공한다. 여기에 선정된 대상자는 304명에 불과하다. 기초단체에서는 청주시와 청원군, 제천시 이렇게 3곳에서만 추가의 서비스 시간을 제공한다. 도내 나머지 시군에서는 아예 시행조차 하지 않는다. 서울시와 충청북도가 다르고, 청주시와 충주시가 다르다.

이렇게 대상자가 축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애인단체에서는 “장애인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꼽는다. 서비스에 대한 필요를 통해서 대상자를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획일적인 등급기준을 통해서 대상자를 선정하는 것이다. 또 가족이 재산이 있거나 소득이 있으면 여기서 다시 탈락된다. 이런 부양의무제 때문에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올해 경남 거제의 이 모 할머니는 부양의무자 소득변화로 인한 수급 탈락 통보를 받은 뒤 “사람이 제도를 만드는데 어찌 이럴 수 있냐”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살을 한 것이다. 2010년 가을에는 일용직 노동을 하던 한 가난한 아버지가 아들의 장애판정 이후 아들의 수급권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문재인 후보 ‘장애등급제 폐지’ 약속
야권 대선후보들 고 김주영 빈소 잇따라 방문

김주영씨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정치권에서도 발 빠르게 대책을 제안하고 나섰다. 김주영 씨의 빈소가 차려진 뒤 야권의 대선후보인 문재인, 안철수, 심상정, 이정희 씨가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27일 대선후보 중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문재인 후보는 조문 뒤에 장애인활동가들과 간담회를 갖고 “활동보조서비스 대상 및 시간(급여) 확대를 비롯해 하위소득자 본인부담금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국민의 명령 1호 공약’으로 ‘장애등급제 폐지’를 발표했다.

안철수 후보는 29일 오전 6시쯤 언론에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빈소를 찾아 유가족을 위로한 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관계자와 면담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심상정 후보는 28일, 이정희 후보는 29일 밤에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장애인활동보조지원제도란?

“활동보조가 없어서 학교에도 못가고 집안에 방치되고 시설로 보내지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선택만을 강요받아온 수많은 세월의 한을 어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은 때에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때에 먹고 남들처럼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그런 절절한 꿈을 어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인간답게 살다가 인간답게 죽고 싶다는 우리의 바람이 어찌 사치란 말인가.” 김주영씨 사망이후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성명서에 나온 구절이다.

2008년도부터 시행된 장애인활동보조지원제도는 장애인에게 목욕과 같은 개인 위생 및 식사등과 같은 신체활동을 지원한다. 집안 청소 및 세탁, 취사와 같은 가사활동을 지원하고 등하교 및 출퇴근, 외출과 같은 사회활동을 지원해 주는 제도이다.

혼자서는 거동이 불가능한 장애인들은 이러한 활동지원서비스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한다. 실제로, 이종일 청주직지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도 “나이 50이 되어서 만난 이 제도를 통해 온전한 자립 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소장은 “활동보조인과 전동스쿠터, 이 두 가지야 말로 나를 인간으로 살게하는 원동력”이라며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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