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근 변호사

5·16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김대중 후보가 선전하고(득표율 45.3%), 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야당 의석수가 크게 늘어나자 장기집권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1972년 10월 17일 비상조치를 단행하여 헌정을 중단시켰다. 그 직후 유신헌법이 만들어졌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하였다. 1972년 12월 새 헌법에 따른 제8대 대선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재적 대의원 2359명 가운데 2357명이 박정희를 지지하고 2표가 무효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허수아비였음이 명백하게 증명되었다. 유신헌법은 무늬만 헌법이지, 초헌법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73년 8월 일본에 있던 김대중을 납치하기도 했다.

1973년 10월부터 유신반대 시위가 시작되어,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반대투쟁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은 그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면서 학생, 정치인 등 180여명을 무더기로 기소했다. 그 가운데 8명이 1974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지 20시간 만에 사형을 당했다. 국제법학자회는 위 대법원 판결이 있던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최근 위 민청학련 사건들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고 있다. 2012년 9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박형규 목사에 대한 재심사건에서 검사는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을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 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되었다”며 무죄를 구형하고, 판사 또한 무죄를 선고하면서 “이 판결이 부디 피고인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우리 사법에 대한 안도로 이어지길 소망한다”고 했다. 박근혜 후보는 위와 같은 재심판결들과 관련하여, 어느 것이 옳은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고 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수장학회는 박정희가 5·16 이듬해인 1962년 부산의 기업인 김지태로부터 강압으로 빼앗은 것이다. 원래는 부일장학회였는데 강탈 후 5·16장학회로 바꾸고, 1982년 전두환 정권 때 박정희의 ‘정’과 그의 부인 육영수의 ‘수’를 따 정수장학회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박근혜 후보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 이사장으로 있었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김지태의 유족이 낸 주식반환청구소송에서 “김지태가 정부의 강압에 의해 주식을 증여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취소권이나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이 이미 지났기 때문에 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는 지난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부일장학회의 취득에 강압은 없었다고 했다.

박근혜 후보의 사법기관에 대한, 아니 헌법가치에 대한 인식에 엄청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사건들이다. 이쯤 되면 박 후보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쳐야 정상적인 사회다. 그런데 그녀 지지율은 여전히 40%를 훌쩍 넘고 있다. 최근 주간지 ‘시사IN’에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박정희는 가장 신뢰하는 대통령 순위에서 노무현(33.7%)에 이어 2위(32.9%)고, 불신의 순위에서는 2.4%로 가장 낮았다.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이번 대선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인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싸움 상대는 밖에만 있지 않다. 과거 같은 진영에서 노무현을 흔들던 사람들은 지금 쇄신을 들먹이며 ‘친노’를 흔들고 있다. 문재인 후보 선대위에 있던 ‘친노’ 참모 9명이 물러났다. 누구는 문재인이 팔뚝을 잘렸다고 했다. 피 맛을 본 사람들은 국민참여경선으로 당선된 이해찬, 박지원까지 물러나야 한다고 한다. 또 다른 세력은 감 잡을 수 없는 ‘정당쇄신’을 하지 않으면 단일화하지 않겠다고 압박한다. 이래저래 힘든 싸움이다. 화리생련종불괴(火裏生蓮終不壞)라, 불 속에서 핀 꽃이라야 끝내 스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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