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정 사회학박사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말하는 모자’라는 별명이 붙은 적이 있다. 1980년대 초 엘리자베스 여왕이 미국에 방문했을 때 백악관의 연단은 키가 큰 부시 대통령의 키 높이에 맞춰져 있었다. 당연히 부시 대통령보다 키가 작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연단에 올랐을 때 여왕의 얼굴은 단상에 가려지고 말았고, 참석자들은 여왕의 우아한 모자만 보게 되었다. 그 후로 여왕을 두고 ‘말하는 모자’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던 것이다.

‘말하는 모자’를 떠올리게 된 것은 얼마 전 한 행사에서 이와 반대되는 해프닝을 보게 되면서부터다. 이 날 행사는 성별영향분석평가 유공자를 시상하고 각 지자체에서 실시한 사업 중 우수사례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 행사는 여러 가지로 인상 깊은 데가 있었다. 먼저 참석자의 절반 이상이 남성들이었다. 여성대회나 여성문제 토론회에 가보면 참석자들 대부분이 여성이기 일쑤이고, 더 많은 남성들이 여성행사에 참석해야 한다는 지적이 어김없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날 행사에는 젠더 이슈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도 성별영향분석평가라는 성 주류화 제도가 전 기관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우수기관 담당자와 우수사례 과제 담당자로 장관표창을 받은 수상자는 남성이 훨씬 많았다. 여성친화도시인 청주시 여성정책담당자도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대열에 서 있었다. 이어서 몰성적으로 시행되던 사업을 성평등하게 개선한 사례를 발표하는 순서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달리 키가 큰 발표자가 연단에 서면서부터였다. 키가 큰 발표자가 연단의 마이크에 다가갔으나 발표자와 마이크와의 거리가 두 뼘 가량은 되어 보였다. 허리를 엉거주춤하게 구부렸으나 여전히 제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소 근엄하게 앉아있던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고, 행사 관계자가 급히 무선 마이크로 바꿔 주고 나서야 발표자가 안정적인 자세로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발표자가 무선 마이크를 잡고 바르고 안정된 자세로 발표를 마치면서 “사회 모든 부문에 성평등 문화가 전도되는 그 날까지 최선을 노력을 다하겠다”고 덧붙이자 다시 한 번 객석에서 웃음과 박수가 쏟아졌다. 성평등 전도사를 자임하는 남성 공무원들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요즘 각 시·군마다 2012년도 성별영향분석평가 작업에 착수하고 있다. 과제 담당 공무원들 사이에서 분석평가가 생소하고 복잡하게 느껴진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분석평가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 키에 따라 연단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것처럼 어쩌면 작은 것에서부터 정책 수혜자를 고려하는 관심과 배려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정책개선을 고민한다면 주민 삶의 질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성별과 무관할 것으로 보이는 건물, 도로, 계단, 자동차, 버스 손잡이 등이 사실은 사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만족도가 다르고 사회적으로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정책결정자들이 하루쯤 유모차를 끌고 나가 시내버스를 타보는 체험을 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러면 똑같은 조건과 환경이 사람에 따라 얼마나 불편하게 다가오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책입안자가 모든 입장을 대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정책결정 과정에 여성, 노인 등 소수집단을 대표하는 이들이 골고루 참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또한 객관적이라고 여겨온 법·제도 역시 성별로 서로 다른 영향을 준다. 그래서 성별영향분석평가는 제·개정 자치법규도 모두 평가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충북도는 최근 성평등정책팀과 성별영향분석평가팀을 운영하고 여성플라자 설립을 검토하는 등 양성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앞으로 성평등이 점점 확산되어 관련 부서뿐 아니라 여러 부서 공무원들이 성평등 전도사로 활약하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