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판매왕, 노동자로 일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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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판매왕, 노동자로 일어서다
  • 김남균 노동전문 기자
  • 승인 2012.10.11 0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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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비인간적 대우에 대한 분노 때문에…노조활동
와이셔츠, 넥타이차림에 빨간조끼 걸쳤던 ‘영업스타일’

민주노조,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3
이길호 전 민주노총충북지역본부장

▲ 민주노총 2대 본부장을 지낸 이길호씨는 자동차 판매왕 출신이다. 그는 돈보다 인간적인 대우를 원했기 때문에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 육성준 기자 eyeman@cbinews.co.kr

민주노총충북지역본부 2대본부장과 현재 진보정당의 모태로 평가되는 ‘국민승리21’의 충북도지부장을 역임한 이길호(58세)씨의 옷차림은 십 수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소박하지만 말끔하게 정돈된 와이셔츠와 넥타이 차림의 ‘정장스타일’이다. 농성 중에도 이 스타일 위에 빨간색의 노동조합 조끼를 걸쳤다. 이 옷차림을 보면 영락없는 ‘영업스타일’의 유전자를 느낄 수 있다. 이 전 본부장은 영업실적 면에서도 탁월했다.

노조활동을 시작하기 전인 1988년도와 1989년도에 충북에서 ‘자동차 판매왕’이었다는 사실도 그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지금도 이 사실을 뿌듯해한다. “제가 30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 16년을 노조일만 했어요. 그래도 저의 자동차 누적 판매량을 앞서는 사람은 충북에서 거의 없을 거에요.”

‘자동차 판매왕’이었으면 수입도 짭짤하고 대우도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노동조합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냐’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때 당시에는 단적으로 출퇴근이란 개념조차 없었어요. 관리자가 퇴근하는 시간이 퇴근시간이었죠. 모든 게 그랬어요. 사람이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죠. 그게 너무 싫었어요. 돈이요? 그것보다 동료들과 같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은 거, 딱 그 거였어요”라고 명쾌히 설명했다. 그는 또 “지금도 모아놓은 돈은 없어요. 이상하게 돈에 대해선 욕심이 생기지가 않아요”라며 웃었다.

권력화된 노동운동이 모든 걸 망쳐

그를 판매왕에서 노동자로 바꾼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다. “그때 당시에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가 88년도 정도에 충북으로 넘어왔어요. 그래서 우리도 노조결성을 준비했는데 회사의 압박과 회유가 심했죠. 실패로 돌아갔어요. 1년 뒤인 89년도 말에 다시 사람들을 모았죠. 90년도 1월에 정식 지부를 설립했고, 초대지부장이 몇 개월 만에 그만둬 사실상 초대지부장의 역할을 해왔던 거죠.” 이 전 본부장은 “노조를 만들고 제일먼저 한 일이 출퇴근시간을 확립하는 일”이라고 했다.

또 “경찰의 삼엄한 원천봉쇄를 뚫고 조합원 120명과 참여한 90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받았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회고했다.

정년을 2년 앞둔 이길호 전 본부장은 “지금의 노동운동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했다. “유성기업이나, 캄코(현 보쉬전장)등 그 강했던 노동조합이 버티지 못하는 상황이잖아요. 조직력도 그렇지만, 조합원들의 의식도 예전 같지 않아요. 예전에는 집행부가 잘하는 지, 못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봤기에 정말 간부입장에서 조합원 보기가 무서웠을 지경이었어요.”

노동운동이 이렇게 위기에 빠진 데에는 다른 선배노동운동가들과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어느 순간엔가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일부 간부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예전에는 민주노총하면 ‘도덕성, 투쟁성’이었는데, 이마저도 많이 흠집이 났어요. 어떤 면에서 한국노총사업장과 민주노총사업장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하는 생각도 들어요. IMF 사태 이후 이런 분위기가 확산된 것 같아요. 조합원 눈치 보지 않고, 자기들끼리 세를 이뤄 그렇게 자리싸움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노동조합 위원장 하려면 구속, 수배 뭐, 이런 게 뒤따랐거든요. 희생하는 자리였어요.”

이 전본부장은 “노동운동이 다시 일어서려면 간부들이 먼저 희생하는 자세로 돌아와야 해요.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깨끗해야 된다”고 조언했다.

“원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이길호 전 본부장은 IMF 정리해고 강풍이 몰아치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민주노총충북본부장직을 수행했다. 그때를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정말 힘든 시기였지요. 힘이 모자란다는 게 너무나 절망스러웠어요.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청원 만도노동자(현 (주)보쉬기전, (주)콘티넨탈등)에 경찰 공권력이 투입되고 포클레인으로 담장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정말 이것밖에 할 수 없구나’하는 자괴감에 시달렸어요. 아 우리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구나”하는 절망의 심정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절망조차도 이 전본분장에겐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바위를 깨뜨리진 못했지만 어느 순간엔가 바위를 저 만큼 밀어낸 것 같더군요”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는 ‘국민승리21’ 활동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IMF를 겪으면서, 우리 노동자들이 정치를, 제도를 바뀌지 않으면 노동자가 살만한 세상이 올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디딘 “노동자정치세력화운동의 첫발이 국민승리 21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시작됐던 진보정당운동에 대해서도 분노가 앞선다. “현재 진보정당이 보여주는 모습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다.

이 전 본부장은 노동운동을 하면서 가장 아픈 기억으로 두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아들 녀석이 중학생 때인데, “아빠가 머리띠 묶고 투쟁하는 모습을 친구들이 ‘빨갱이’라며 왕따를 시키고 싸움을 걸어와 너무나 힘들어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민주노총 상근활동가들의 모습이다.

 “그 몇 십 만원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으며 활동을 했잖아요. 그렇게 희생했던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고마워요.” 그는 “김재수, 유영주, 박종효, 정남규 등 모두가 고마운 사람들이죠”라며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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