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혁 규 (청주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4. 15 총선으로 인한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은 한국정치사의 긴 맥락에서 볼 때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진보세력의 역사를 아주 간단히 살펴보자. 해방 후 좌우대립과 뒤이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정치지형은 전체적으로 ‘반쪽 우경화’하였다.

그 후 진보정당은 시종해서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 표를 얻어 유효표의 30%를 획득했던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는 1959년 9월 형장의 이슬로 비운의 삶을 마감했다.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그후 4.19 직후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7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등 잠시 분출하였던 진보세력은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는 5. 16 군사 정권의 등장으로 다시 된서리를 맞는다. 이때 대부분의 혁신정당 주도세력들은 사형을 비롯한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탄압 속에서도 진보세력은 80년대 재야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87년 민주화 이후 제도 정치의 장이 넓어지면서 대선과 총선을 통해 현실 정치세력화의 길을 모색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런 와중에 김문수, 이재오 등 민중당 지도부의 일부는 보수정객으로 변신하기도 하였다.

이런 시련을 딛고 진보정당이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이다. 보수정당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1인 2표제의 정당명부제도와 맞물리면서 민주노동당은 8.1%의 득표율을 얻었다. 그리고, ‘말짱’ 노희찬의 화려한 어록들이 인구에 회자되는 가운데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드디어 원내 3당의 쾌거를 이루었다. 필자는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 의석수 이상의 의미를 가지면서 한국 정치 지형을 선진적으로 재편하리라고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민주노동당의 진출은 제도권 정치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확장시키고 기존 정당으로 하여금 정체성에 대한 자기고민을 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이미 그런 징조들이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유권자들에게는 지역이라는 선택 기준을 넘어서는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할 것이다. 엄청나게 견고한 역사적 뿌리를 가진 것처럼 오해되고 있는 유권자의 지역주의 투표 경향이 보수(이승만)와 진보(조봉암)가 대립하던 56년 대선이나 여당(박정희)와 야당(윤보선)후보 사이의 사상논쟁이 선거의 중요쟁점이던 63년 대선에서는 거의 관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

그런데,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로 인한 정치권의 구조변화는 시민단체들의 역할에도 일정한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우선은 시민단체의 과도정치화에 대한 요구가 줄어들 전망이다. 그 동안, 한국의 시민단체는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제도권 정당을 대신하여 유사정당적인 기능을 자의반 타의반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당구조가 정착되고 정책과 이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문화가 정착될 경우 시민단체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동시에 비교적 개혁적인 인사들이 국회에 진출함으로 인해 시민사회의 많은 개혁의제들이 기존 정당에 의해 대부분 수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반부패 투쟁이라는 시민사회단체를 묶어주던 공동의 개혁 과제가 가진 사회적 중요성도 점차 약화될 것이다.

이런 달라진 환경에서 시민단체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은 새로운 개혁의제들을 발굴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특히, 시민들의 삶과 밀착된 풀뿌리 생활정치적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이슈화함으로써 참여적 시민문화를 뿌리내리는 중요한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정당과 구분되는 시민단체의 역할에 대한 자기 정립이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자기제한성’에 대한 재확인이 필요하다. 정권 획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공익적 이익을 위해서 복무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불필요한 역할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민단체의 핵심 인사가 갑자기 정당의 공천 후보로 변신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 이에 대한 비난도 높아질 것이다. 이에 관한 시민단체 내부의 윤리강령이 필요하다.

셋째로, 제도권 정당과의 생산적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의 의제를 제도화하기 위해서 정책 사안에 따라 여러 정당과의 탄력성 있는 제휴관계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정당에 대한 일상적인 감시와 견제의 기능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과의 관계 설정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80%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민노당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간에는 정책적 연대가 가능한 영역이 많다. 동시에 진보적 재야운동의 퇴조 이후, 일종의 대안적 운동으로 시민운동이 정착된 역사적 전통을 가진 한국 사회에서 양자간에는 어쩔 수 없는 정서적인 이질감이 있다. 따라서,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는 가운데 공공선을 위해서 협력하는 새로운 전통을 마련해야 시민운동 진영과 민중운동 진영간의 행복한 연대가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한 양자의 인내와 노력이 요망된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