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엘지화학 해고 … “다시 돌아가도 선택은 같을 것”

민주노조,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①

“인간이 어떤 시점에서 쓴 이론은 그 시점의 현실을, 그것도 불완전하게 표현한 것이다. 살아 있는 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우리 인간의 인식은 그 풍부한 현실을 늘 빈약하게 따라잡을 수밖에 없다. 이론이 이러한 것이라면 어느 위대한 인간이 과거에 남긴 말을 신성하게 여기거나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강을 건너려고 만든 뗏목을 건넌 다음에도 머리에 이고 가는 것처럼 바보스런 일이다.”

철학자 황광우는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맞다. 과거에 집착해 변화된 환경을 바로보지 못한다면 ‘뗏목을 머리에 이고 가는 우(愚)’를 범하기 맞춤이다. 노동운동이 위기다. 항상 위기라는 말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깊이가 다르다. 그러나 쉽사리 위기를 벗어날 탈출구를 제시하는 이도 드물다. 그리고 이제는 노동운동의 진정성조차 의심받는다. 그래서다. 진정성이 의심받는 이 순간, 과거의 진정성을 찾아보는 것도 탈출구를 찾는데 유익하리라.

이제는 버려야 할 뗏목이라지만 그에 의존해 물을 건너던 시대가 있었다. 그때 그 사람들의 본마음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런데 길 안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길라잡이로 ‘해고’와 ‘민주노조’를 맞바꾼 오현식 씨를 택했다. 먼저 그를 만나본다.

▲ 오현식씨는 17년째 해고자다. 그러나 민주노조와 바꾼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그 상황이 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 육성준 기자 eyeman@cbinews.co.kr
해고와 민주노조를 맞바꾼 삶

“제 어미 팔베개 품에서 곤히 자고 있는 세 살 난 아들을 뒤로하고 흔들렸던 마음을 다시 잡았다. 어차피 누군가는 가야 할 길이다. 되돌아보고, 또 되돌아봐도 시계추처럼 반복됐던 것 아닌가. 노조에 대해, 입바른 소리 했기로 청주공장에 멀쩡하게 잘 있는 사람을 인천영업소로, 강릉영업소로, 서울 본사로 대구 영업소로 인사명령을 냈다. 민주노조 하겠다고 나오면, 회사는 그 잘난 ‘사내 인사명령’으로 삐죽 나온 죽순을 쳐냈다. 이제, 길이 없으면 누군가는 새 길을 가야한다. 해고가 무서워, 지금처럼 회사의 발령대로 순응한다면 민주노조의 싹은 뭉개지고 말리라. 해고자의 길, 그 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회사의 인사명령을 거부하자. 그리고 청주공장에서 민주노조 싸움을 하자. 나는 서울 본사로 출근하지 않고 청주공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996년 1월12일, 그가 선택한 해고자의 삶은 시작됐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지금, 그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그때 상황이라면 똑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왜냐면 내게 주어진 길이었어요”라고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때, 그의 선택이 옳았을까. 그가 해고되던 그해, 엘지화학 노동자들은 기나긴 침묵을 깨고 ‘민주노조’의 깃발을 들었다. 해고된 오현식씨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은 노조의 잘못된 모습을 유인물에 담아 조합원들에게 배포했다.

좋은 자리로 인사발령하면 포기하던 그동안의 노조활동가와는 다른 모습에 회사는 당황했다. 엘지화학 노동자들은 이들의 모습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여름, 산재사망사고가 발생했다. 회사는 이를 은폐하는데 급급했다. 점점 더 엘지화학 노동자들의 불만감이 표출하지 회사와 어용노조 집행부는 당황했다.

당황한 어용집행부는 무리수를 뒀다. 조합원 직선제로 선출하던 위원장을 간선제로 바꾸는 규약개정을 추진한 것이다. 회사는 이를 교묘히 뒷받침해줬다. ‘간선제 규약개정’에 반대하는 대의원들의 참석을 막았다. 8월 28일, 회사의 지원 아래 41명중 29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간선제 규약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순간이 ‘어용노조의 생’은 마침표를 찍는 종지부가 됐다. 엘지화학노동자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분노의 함성을 불길처럼 엘지화학 청주공장을 뒤덮었다. 그가 수배되었을 때, 300여명의 노동자들이 상경(上京) 기차에서 정봉들녘에 선 그에게 손을 흔들며 울었다. 그리고 11월 18일 빼앗긴 위원장선거 직선제를 되찾고 민주노조의 현판을 내걸었다.

위장취업 대학생 통해 눈을 뜨다

그는 1964년 청주 남촌동에서 가난한 농부의 2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충북고를 졸업한 그는 삼립식품에서 1년간 근무했다. 군복무를 마친 그는 88년, 당시 (주)럭키에 입사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러나 그에게 운명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와 입사동기 중에 특이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위장취업’한 김홍찬 씨와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오현식 처장은 김홍찬씨가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정확히 모른다. 단지 신학대학교 출신인 것 정도만 안다. 하지만 김홍찬씨와 인연으로 나중에 석탑출판사에서 나온 ‘노동법해설’을 학습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보았다고 한다. 사창동에 있는 민속주점 ‘파전골목’에서 이뤄진 이 소모임에서 AMK 등 여러 노동자들과 만나게 됐다. 그러나 김홍찬 씨의 위장취업이 발각되고 91년 소련 등 동구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현장에 왔던 학생운동가들은 떠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모임은 해산되었다.

노동법 학습을 하면서도 그는 현장에서 노조를 민주화하려는 활동을 계속했다.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하고, 위원장 선거에 개입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민주노조를 추구하는 노동자들이 나타나면 회사는 여지없이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방식으로 그 싹을 잘라버린 것이다.

1994년 그는 노조 청주지부 교선부장으로 활동한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현장노동자들은 지식도 없고 정보도 없는 상태이고 글 쓰는 재주가 없어서 대부분 대학생들에게 부탁해 노조 소식지를 만들었다. 그러니 노동자들의 생생한 공감을 이끄는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

그에 비해 그가 만든 소식지는 달랐다. 현장 노동자가 직접 만든 소식지에 노동자들이 큰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지연과 학연으로 똘똘 뭉친 조직이나 집행부에서 그와 같은 선진노동자는 왕따였다. 그리고 다시 좌절했다. 그러다가 다시 우연하게 ‘청주노동자의 집’과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청주노동자의 집은 박만순(현 함께 사는 우리 대표·충북대 85학번)씨가 대표로 있었고, 민주노총충북본부상담소장을 지냈던 유영주 전 소장(충북대 83학번)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속에서 ‘좋은 친구들’이란 소모임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소모임에는 이영섭(정식품)을 비롯해 한국야금, 정식품, 엘지화학 등 공단지역 노동자들이 함께 했다(이 소모임에 참석했던 이영섭은, 후에 민주노총충북본부장이 되었다).

해고된 그 자리, 경계가 되다

그는 현재 전국화학노동조합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술자리에서 오현식 처장은 후배노동자들에게 즐겨 말한다. “절에는 풍경소리가 들리고, 교회에는 찬송가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게 순리고 진리다”라고. 이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릴까.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몸은 노동자인데, 생각은 다르게 한다. 그러면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절에서 찬송가 찾지 말고, 교회에서 풍경소리 찾아봐야 찾을 수 있겠나. 노동자라는 내 위치를 잊지 말아야지….”

하지만 그의 위치는 경계가 되었다. 엘지화학 공장 앞에 서면,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해고자, 이미 기억조차도 희미한 외부인 일 것이다. 물밀듯이 밀려와 썰물처럼 빠져나간 80년대 학생운동가와 90년대 치열했던 학출(學出·학생출신) 노동운동가들과의 인연도 이제는 경계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변화된 환경을 이야기하며, 노동운동을 효용을 다한 뗏목처럼 강가에 던져버렸다. 누구는 정치권으로, 누구는 시민운동으로. 하지만 96년 1월 해고된 그 자리에서 한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필자의 눈에는 그는 첫 번째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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