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인혁당 사건 역사 판단에 맡기자” 발언에 울분 토해
유 의원도 민청학련 관련 사형선고 전력 … 38년만에 무죄

<유인태 의원의 항변>

▲ 제천출신의 유인태(서울 도봉을·민주) 의원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역사관을 정면 비판했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사형선고를 받았던 유 의원은 박 후보가 ‘인혁당 사건을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피해자들에 대한 부관참시”라고 받아쳤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아의 말이다.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일과 그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5·16쿠데타에 이어 인혁당 사건이 이번 대선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등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역사인식이 대선의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으니 카아의 명제는 정확했다.

최근 “5·16은 아버지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발언과 관련해 여론이 들끓은데 이어 10일 MBC라디오에 출연해서는 “인혁당 사건은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 또다시 인구에 회자되며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박 후보는 11일에도 “최근의 여러 가지 증언들까지 감안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라며 기존의 입장을 반복했다.

박 후보의 발언과 관련해 논란의 불씨를 지핀 사람은 제천 출신의 3선 유인태(서울도봉구을·민주통합당) 의원이다. 유 의원은 11일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박 후보가 아버지 시대에 피해를 당한 분들께 죄송하다고 했는데, 부관참시를 하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라며 “당은 박 후보의 발언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관참시(剖棺斬屍)란 매장했던 시신을 꺼내 훼손하는 형벌을 일컫는다.

유 의원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법원 판결 이전에 이미 사형집행에 착수했고, 이분들은 영문도 모르고 잡혀가서 사형을 당할 때까지 가족 면회도 한번 못했다”며 “박 후보가 하는 짓을 보면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의 흔적이 없다’며 담화를 취소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유 의원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지난 2월 재심을 통해 38년 만에 무죄가 확정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유 의원의 발언을 계기로 박 후보를 향한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엄연히 인혁당 사건 판결은 2007년 1월 무죄 판결이 최종 판결”이라며 “대법원 판결이 두 개로 나왔다는 박 후보의 발언은 사법부를 무시하는 황제적 발언”이라고 규탄했다.

박영선 국회 법사위원장도 “박 후보의 발언을 인정한다면 대한민국에는 2개의 대법원이 존재하는 것”이라며 “헌정 질서를 무시하는 초사법적 발언으로 한나라의 대통령 후보로서의 역사관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朴, 1·2차인혁당 구분 못한 듯

박지원, 박영선 의원이 ‘2개의 대법원’이라고 표현한 것은 박 후보가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왔다”고 발언한데 따른 것이다. 박 후보는 11일 국회 본회의 참석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이 나온 것도 있지만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 여러 증언들을 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제는 박 후보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과 10년 뒤에 다시 터진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후보가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의 증언’이라고 말한 것은 민주당, 신한국당을 지낸 박범진 전 의원이 2010년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출간한 학술총서 <박정희를 회고한다>에서 증언한 내용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의원은 이 책에서 “인혁당에 입당해서 당의 강령과 규약을 봤고 입당선거까지 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박 전 의원은 이 문제가 불거지자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1964년 1차 인혁당에 관한 것일뿐 2차 인혁당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밝혔다.

1차와 2차 인혁당 사건 사이에는 1972년 ‘10월 유신’이 있다. 10월 유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기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비상조치를 발표하고 대통령 간선제, 언론 및 국민의 언행을 탄압하고 의회를 장악한 것을 말한다. 유신의 종말은 결국 1979년 10.26사태였다.

인혁당 사건의 전개와 결말 역시 1차와 2차가 사뭇 다르다. 이 역시 1972년 10월 유신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밝혀 결론적으로 박 후보의 역사인식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한 박범진 전 의원 또한 충북 영동출신이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 박범계(대전 서구을·민주) 의원 등이 모두 일가로, 영동의 정치 로열패밀리다.

이처럼 박 후보가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시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아버지의 독재를 두둔하면서 새누리당 내에서도 박 후보의 역사관 논란이 대선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박 후보 스스로 국민대통합이라는 시대정신을 내세우면서도 과거 불행한 역사와의 화해는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박 후보의 행보가 보수대결집을 촉발시키고 박정희 시대의 경제부흥에 대한 향수를 불러와 선거판이 극단적인 이념대결로 치달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2차 인혁당, 긴급조치 빌미 군사재판
속전속결, 사형확정 18시간만에 집행

<1·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이해>

그렇다면 박근혜 후보가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1·2차 인혁당 사건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1차 인혁당 사건.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 중에 있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로부터 사건을 송치 받은 서울지검 공안부는 구속연장 만료일 “증거가 없어 기소를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소를 거부했다.

이에 신직수 당시 검찰총장은 ‘검사 동일체의 원칙’에 따라 기소 내용을 알리가 없는 당직 검사를 통해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65년 6월 항소심 재판부는 10년 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게 될 도예종에게 징역 3년, 박현채 등 6명에게 징역 1년, 이재문 등 6명에게 징역 1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후 대법원에서 이 판결이 확정됐다. 1차 인혁당 사건은 유가족 등에 의해 2011년 4월 재심이 청구돼 재심 여부가 법원에 계류 중이다.

10년이 흐른 1974년 4월 도예종 등 23명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됐다.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이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긴급조치 1·4호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된다. 특히 긴급조치 1호는 군사법정에 회부하는 것을 가능케 했고,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을 1항에 명시하며 이들에게 “사형”을 내릴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법원은 군사법정의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긴급조치 1·4호에 규정된 대로 이들 가운데 8명은 1975년 4월8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은 18시간만에 집행된다. 그러나 이들을 사형으로 내몬 긴급조치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법원에 의해 수차례 위헌임을 지적받아 왔다.

피해자 유족 등은 2차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2002년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2005년 형사소송법에 따라 재심 결정을 내렸다. 2007년 억울하게 죽은 8인은 33년여만에 무죄판결을 받는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