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는 배달의 꽃이다. 꽃잎에는 배달의 향수가 은근슬쩍 배어있다. 꽃잎이 가신 님의 옷자락이라면 씨방은 한(恨)많은 한민족의 응어리이다. 장미처럼 화사하지도 않고 철쭉처럼 요염하지도 않지만 진달래꽃은 물오른 나무와 들풀사이 사이로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며 연분홍 빛 춘정을 여러 사람에게 전한다.

소위 ‘핑크빛 무드’는 서양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동양,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놓고 ‘아이 러브 유(I love you)를 하는 서양의 직선적 사고와 달리 우리는 진달래 꽃처럼 우아하게 피어있거나 그냥 웃음으로 대답하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의 곡선적 사유세계를 갖고 있다.

분홍색 핑크 무드를 장식한 첫 번째 사람은 누굴일까. 그것은 자그만치 50만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구석기 유적인 청원 두루봉 동굴 제 2굴 7문화층에서 진달래 꽃씨가 1백57개나 검출되었다. 산성 토양에서 잘 자라는 진달래가 어찌하여 알카리성 토양인 이곳의 굴 입구에서 집단적으로 나온 것일까.

충북대 이융조 교수는 ‘벌써 이때부터 미의식이 작용된 것으로 본다’며 ‘선사인이 의도적으로 꽃을 꺾어다 굴 입구를 장식했다’고 해석했다. 이 교수는 이를 ‘꽃을 처음 사랑한 사람들’(First flower people)로 표현하였다.

그때부터 내려오던 진달래꽃에 대한 각별한 정서는 화전(花煎)놀이나 김소월의 시에서 보듯 폭넓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형성했던 것이다.

‘가소롭다 가소롭다 여자 일신 가소롭다/ 규중에 깊이 묻힌 여자 유행 같을 소냐/ 우리 동류 서로 만나 한번 놀기 어렵거든/ 무심하신 남자들아 우리 말 좀 들어보소/ 팔자 좋은 남자들이 부럽고도 애닯으다’

화전가(花煎歌)에서 보듯 화전놀이에서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들떴고 어렵사리 봄나들이를 허락 받은 아낙네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평소의 맺힌 한을 털어 냈던 것이다. 진달래 꽃잎으로 전을 지져 먹고 화전가로 진달래와 소통하니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아니고 무엇이랴.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삼월 삼짇날을 전후하여 몸단장을 곱게 한 후 봄나들이에 나서는 아낙네들은 마냥 설레기 마련이다. 쌀가루 반죽으로 전을 부치는데 이때 진달래 꽃잎을 여러 모양으로 예쁘게 수놓았다.

꽃잎 자체를 먹어도 탈이 없는 꽃은 흔치 않은데 봄의 첫 전령인 진달래는 설렘의 꽃봉오리를 눈으로도 감상케 하고 또 꽃잎 자체를 제공하며 상춘의 맛을 더해주었으니 가히 살신성인의 아름다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자들은 시회(詩會)를 열고 양반집 규수들은 남자들의 시회를 본떠 시재(詩才)를 뽐내기도 했다. 이른바 화전답가(花煎答歌)인데 한 사람이 지은 시를 다음 사람이 받는 형식이다.
열양세시기에는 ‘남산의 잠두(蠶頭), 북한산의 필운대, 세심대가 놀이장소‘였음을 밝히고 있으나 이외에도 경치 좋은 곳이면 화전놀이가 곳곳에서 열렸던 것이다. 아낙네들은 흥이나면 ‘산유갗 ‘화초갗 등을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으며 진달래 꽃잎을 입에 물거나 머리에 꽂기도 하였다.

그때의 상춘은 진달래 꽃으로 전을 부치거나 지필묵으로 시회를 여는 정도였지 요즘처럼 고기를 굽고 술에 취해 요란을 떨지 않았다. 놀이 문화에도 어느 정도 절제의 미학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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