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경선…도지사 추천인사 낙마 놓고 설왕설래
선출방식 없는 허술한 정관, 정치적 개입 가능성 상존

전쟁터에서도 이 기구의 깃발을 단 차량은 공격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종교적인 이유로 십자가를 꺼리는 이슬람국가들도 붉은 초승달 즉 ‘적신월(赤新月)’로 그 표장을 대신하되 역시 정치적 중립성을 존중한다. 1859년 앙리 뒤낭에 의해 창시된 국제적십자에 대한 얘기다. 적십자는 전시 부상자 구호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평시 건강증진, 질병예방, 재해구제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남북이 분단돼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늘 대화와 교류의 물꼬를 트는 것도 적십자다.

그만큼 비정치적인 적십자 회장 자리를 놓고 충북에서 때 아닌 정치논란이 일고 있다. 이시종 충북지사의 사람으로 꼽히는 남기창 전 청주대 교수가 충북적십자 차기 회장에 추천됐음에도 낙마하는 이변이 벌어진 것이다. 상황만 놓고 보면 이 지사가 코드인사를 추진했으나 불발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 충북적십자 회장 자리를 놓고 지역사회가 내홍을 겪고 있다. 이시종(왼쪽) 지사가 추천한 남기창(가운데) 전 청주대 교수가 유례없는 경선 끝에 성영용(오른쪽) 전 충북도교육위 의장에게 탈락한 것이다. 지사가 적십자 회장을 추천하는 관행도 정치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한 것은 아닌지 의견이 분분하다.

충북적십자는 8월 9일 2차 상임위원회를 열어 상임위원 중에 한 명인 성영용 전 도교육위원회 의장을 28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날 회장선출은 이례적으로 충북도가 추천한 남 전 교수와 성 전 의장이 경선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18명의 상임위원 중 15명이 참석해 10명이 성 전 의장에게 표를 던졌다. 성 전 의장은 대한적십자 총재의 인준 절차를 남겨놓고 있다.

남 전 교수는 지난 지방선거 때 이 지사의 선대위원장을 맡아 당선에 일조했고 당선 직후 인수기구로 구성한 도정 기획단장을 맡아 활동하는 등 이 지사의 사람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남 전 교수는 민선5기 출범과 함께 요직에 중용될 거라는 하마평이 나돌기도 했으나 당시 정치적 색채가 옅은 차기 적십자 회장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정리됐다.

결국 2년을 기다렸으나 의외의 변수로 뜻을 이루지 못한 셈이다. 이같은 이변을 놓고 지역의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이 지사의 정치력 부재가 드러났다’거나 ‘기득권과의 소통부재에 따른 결과로 봐야한다’는 등의 뒷담화가 오가고 있다. 심지어 ‘지사가 선거공신을 적십자 회장에 앉히려고 무리수를 둔 것부터가 문제였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제까지의 적십자 회장 선출구조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이 지사가 코드인사를 시도한 것이 문제였고, 그마저도 관철시키지 못한 것은 정치력 부재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동안 충북적십자 회장 선출은 명예회장인 지사가 낙점한 인물을 예외 없이 추대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왔다.

이는 대한적십자사 정관의 지사 회장 선출규정이 모호한 것에서 비롯됐다. 적십자 정관 30조(지사임원 및 고문) 1항은 ‘지사에는 임원으로 회장 1인, 부회장 2인, 재정감독 1인을 두고 고문으로 법률고문 1인을 둔다’고 돼있으며, 회장선출에 대해 언급한 2항은 ‘회장은 상임위원회에서 선출한 후 총재의 인준을 받아야한다’고 돼있다. 여기까지가 전부다. 회장 선출과 관련해 추천이나 입후보 절차는 물론이고 만약 경쟁자가 있을 경우에 대비한 경선 룰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정국장 “문제없다” 보고에 오판

결국 광역자치단체의 최고권력자이자 적십자 명예회장인 도지사가 회장을 추천하면 상임위가 동의하는 요식행위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사가 추천한 인물 대신 성 전 의장을 선출한 것 또한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다는 추정도 가능해진다. 흐르던 물이 처음으로 역류했다는 점에서 현직지사보다도 강력한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했다는 주장이다.

일단 예기치 않은 결과와 맞닥뜨린 남기창 전 교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남 전 교수는 “도에서 추천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와서 ‘조건이 된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는 일부 상임위원들끼리 놀아나는데 나만 바보가 된 거다.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몰랐다. 이번 일로 적십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악화될까 걱정이다. 뭐라고 얘기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문을 닫았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손’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첫째는 청주대 교수회장을 지내는 등 청주대 반(反)재단의 대표인사 격이었던 남 전 교수에 대해 청주대의 뒤늦은 반격이 감행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15명의 상임위원 중에는 청주대 설립자 집안의 3세대인 김윤배 청주대 총장과 김경배 대한건설협회 충북도회장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심이야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들이 다른 상임위원들의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 다른 설은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가 반(反) 이시종 세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정치적 입김이 제대로 작용한 셈이다. 선출과정에서 성 전 의장이 강력한 권력의지를 보이면서 충북도가 진행과정을 예의주시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변이 연출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충북도가 안심(?)을 하기까지는 몇 사람의 언행을 믿고 오판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가장 큰 문제는 당연직 상임위원인 김경용 충북도 행정국장의 판단미숙이다. 김 국장은 선출 하루 전 ‘최악의 경우 표결로 갈 수 있으나 표결로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청 일각에서는 ‘모의투표라도 해봐야한다’는 식의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이같은 주장은 기우로 간주돼 묻혔다는 것이다.

민선4기 지사를 지낸 정우택(청주 상당·새누리당) 의원의 선거참모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Q상임위원이 성 전 의장과 남 전 교수의 3자 대면을 주선해 후보단일화를 추진했던 것도 이 지사를 방심케 했다. 당연히 순리대로 가려는 것이려니 판단했지만, 방심은 이 지사를 뜻밖의 결과와 조우하게 만들었다.

도청 내 일각에서는 정우택 지사시절 출범한 현 적십자 집행부 인사 가운데 특정인이 이번 사태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어 논란은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총재인준 절차남아… 서울서 인준보류 따른 사퇴 전례도

유례없는 적십자 회장 경선을 치르고 당선자 신분이 된 성영용 전 충북도교육위 의장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인준을 받아 무사히 회장직에 오를 수 있을까? 그러나 무혈 입성했던 전례와는 달리 인준까지 과정이 험난할 가능성이 높다.

충북 적십자 간부를 지낸 K대의원 등이 선출절차의 합법성을 놓고 문제를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관에 선출방식 등이 명기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례없는 경선을 진행하게 된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입후보 기회를 제공하고 정견발표 등 필요한 절차를 진행했어야한다”는 것이 K씨의 주장이다.

타 지역에서 인준이 거부된 사례도 있다. 지난해 오세훈 서울시장 재임시절 오 전 시장이 추천했던 제타룡 현 회장 대신 김 모씨가 선출됐으나 총재가 인준을 보류하는 내홍 끝에 자진 사퇴했고 당초 추천했던 제 회장이 다시 선출된 것이다.

이에 대해 성 전 의장은 “적십자 봉사원들은 누구나 회장을 꿈꾼다. 출마를 준비했다기보다는 의욕만 있었다. 입후보 등 경선절차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사무국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사무국에 ‘문제가 없도록 법적인 절차를 준비하라’고 당부했는데 사무국은 ‘상임위에서 결정하면 된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어찌 됐든 이번 사태로 도와 적십자 사이의 원만한 유대관계가 유지될지 우려를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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