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2월 민정이양까지 ‘2명의 30대 군인지사’

▲ 5·16쿠데타로 충북의 첫 민선지사가 6개월만에 물러나고 1963년 12월 민정이양까지 2명의 30대 군인 지사가 도정을 장악했다. 11대 고광도(왼쪽), 12대 최세인(오른쪽 당시 36세) 지사. 사진=충청리뷰 1996년 간행 <도정반세기>

4·19혁명 이후 혼돈 속에서도 제2공화국 수립을 위한 계획은 활발하고 신속하게 진행됐다.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모방한 헌법개정안이 1960년 6월15일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되고 7월29일 민의원·참의원 양원선거에서 민주당은 압도적 의석을 차지한다. 8월12일 양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 대통령을 선출하고, 18일 장면 국무총리를 인준했다.

10월7일자 정부 인사발령을 통해 제9대 충북지사로 임명된 이는 중원군(현 충주)이 고향인 조대연 지사. 조 지사는 구한말 최후의 초급관료로 잠시 재직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해방이후 정계에 진출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부산 피난국회에서 의정활동을 했다. 1955년에는 신익희, 조병옥, 장면 등 야당정치인과 의기투합해 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조 지사의 9대 재임은 2개월여에 불과했다. 당시는 시·읍·면장만 선거로 뽑고 서울시장, 도지사는 중앙에서 임명했는데, 이에 대한 논쟁이 있어 같은 해 12월29일 서울시장 및 도지사 선거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조 지사는 10대 선거에도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5.9%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그러나 초대 민선 지사 임기도 6개월을 채우지 못했다.

5·16쿠데타에 따른 후속조치로 군이 충북도정을 접수했기 때문이다. 5·16직후 향토사단인 37사단장에 고광도 준장이 임명됐고, 고 준장은 5월24일 충북지사로 부임했다. 고 준장의 당시 나이는 충북지사 가운데 최연소인 37세였다. 충북도에는 기획통제실이라는 무소불위의 기구가 생겼고 실장은 오충식 중령이었다.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회계감사팀장은 김봉기 소령, 언론보도를 검열하는 자리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김 대위가 맡았다.

최연소 도백이라는 기록은 1962년 3월14일에 깨졌다. 고 지사보다 2살 아래인 최세인 소장이 후임으로 부임한데 따른 것이다. 최 지사는 1947년 3개월 코스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6·25전쟁에서 전공을 세워 33세에 별을 단 인물이었다.

박정희가 이끈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1962년 8월12일 민정이양에 관한 계획을 최초로 결정하고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를 치렀으나 박정희는 이 선거에 군복을 벗고 출마해 당선된다. 도정이 민정으로 이양된 것은 대통령 취임 하루 전인 12월16일이다. 이때 최 지사는 이임사를 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하니 30대 장군이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청주중앙공원엔 5·16 기념비 존치
1962년 군인 시장이 세운 뒤 위치 옮겨가며 보존

▲ 청주중앙공원에 남아있는 5.16혁명 기념비
청주중앙공원에는 ‘5·16혁명 기념비’가 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후 5·16을 군사쿠데타로 규정하면서 철거논란이 있지만 위치를 옮겨가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이 비석은 4·19기념비를 세운 지 1년 만에 몰아내고 중앙공원의 중앙을 차지했으나 현재는 청주문화관 뒤편으로 물러났다.

5·16혁명 기념비는 1962년 5월 현역 군인(중령)인 김삼중 청주시장이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역 시민단체가 청주시에 수차례에 걸쳐 철거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 비석은 가로 50㎝ 세로 250㎝ 크기로 뒷면에 건립자를 ‘10만 청주시민 일동’으로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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