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에서 수도를 옮기는 이유는 대략 3가지 정도로 꼽힌다. 첫째는 군사적 이유요 둘째는 정치는 이유며 셋째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이다.가장 큰 이유는 역시 군사적 사정이다. 적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면 천도하지 않고 배겨날 재간이 없다. 마한 세력을 통합하고 한강변에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던 한성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침입으로 개로왕이 전사한데다 마지막 보루인 남한산성까지 잃자 문주왕은 눈물을 머금고 웅진(공주)으로 천도한다.

온조왕이 나라를 세워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백제사의 3분의2가 한성 백제에 있거늘 오늘날 세인들은 백제 하면 한성백제를 까맣게 잊고 공주나 부여만을 연상하기 십상이다.한성 백제의 치소(治所)인 하남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선 학설이 분분하나 근자에 드러난 풍납 토성의 규모나 위용으로 보아 이곳이 하남 위례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백제의 웅진 시대는 63년간(475~538)으로 매우 짧으나 이기간 무령왕 등이 재위하면서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성왕은 538년, 수도를 다시 사비(부여)로 옮기며 한때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불렀다. 성왕은 신라와의 관산성(옥천) 전투에서 시찰을 나갔다가 구천(狗川:개내)에서 신라의 복병에 잡혀 최후를 마쳤다. 구천의 구진벼루에는 아직도 성왕의 보검이 감춰져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고구려의 천도는 군사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가 복합되었다.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집안(集安)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표면적으로는 군사전략의 변화를 꼽았으나 내적으로는 정치적 홍역 때문이었다. 남쪽을 지키고 요하의 서쪽으로 진출하는 서진남수(西進南守)에서 서쪽을 지키고 한반도 남쪽으로 진출하는 서수남진(西守南進)으로 정책을 바꾸며 평양천도를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장수왕의 속사정은 표면적인 이유와 전혀 달랐다. 한곳(국내성)에 5백년을 있다 보니까 호족의 발호가 지긋지긋했고 더러는 왕권을 위협하였다. 고구려의 고분벽화가 집안에 밀집되어 있는 것도 호족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세 번째 풍수지리설에 의한 천도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의한 것이다. 이성계는 정신적 스승인 무학대사의 점지에 따라 계룡산 신도안, 지금의 서울을 두고 고민을 하다 서울을 수도로 삼은 것이다.

통일신라때는 9주5소경을 두었다. 남원경(남원), 서원경(청주),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 금관경(김해)이 5소경이었는데 5소경중 2소경이 바로 충북에 있다. 5소경의 설치 역시 군사적, 정치적 목적이 결합된 것이다. 통일신라의 변방을 굳게 지키고 점령지에 거주하는 주민을 무마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청주는 초기에 백제의 영토로 상당현(上黨縣)으로 불리웠다가 고구려 시대에는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성(娘子谷城)으로 불렸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원으로 통칭되었다.

신문왕 5년(685), 3월에 서원에 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元泰)를 사신(仕臣)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오늘날 충청권으로의 신행정수도의 설치는 군사적 이유가 주된 원인을 제공하던 고대국가의 천도와는 다르다. 고대국가는 왕권강화였으나 지금은 지방분권 강화 차원이다. 아무튼 충청권은 서원경, 중원경, 부여, 백제 등 고도가 많다. 신행정 수도의 충청권 이전은 역사의 회전법칙에 기인했다는 느낌도 일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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